나에겐 죽마고우가 몇 명 있다. 그 중 한명은 해산물을 싫어한다. 그리고 오이도 매우 싫어한다. 내가 이 친구에게 세계에서 제일 회를 잘 만드는 요리사가 직접 만든 음식을 제공하면 기뻐할까? 아니면 최고급 오이로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제공하면 좋아할까?
아무리 잘 만든 음식일지라도 내 친구에게는 라면 한 그릇만 못한 음식이다. 만약 이 친구에게 "넌 입맛이 왜 그래?", "먹어봐, 정말 잘 만든 음식이야", "맛있는데 넌 왜 그러니" 등 이런 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될까?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한우를 좋아한다. 충분히 그 가격을 지불하고 먹을 의향이 있다. 또 다른 내 친구도 한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가격을 지불하고 먹을 의향은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돼지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는다. 내 친구에게는 한우는 맛있지만 그저 비싼 음식일 뿐이다. 종종 친구들과 함께 먹거나, 누군가 사줄 때나 먹는 음식이다. 개인적으로 사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주변에서 왜 한우를 좋아하면서 사먹지 않냐고 물어보고 바보 같다고 비난하면 어떻게 될까?
모든 사람들이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로의 취향을 존중(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오랜기간 있었던 집단주의 문화의 영향일까? 그러나 집단주의의 의미는 개인의 의사와 이익보다 집단 전체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관점인 반면,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지금 문화는 전혀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되고 있다.
이는 단지 일부 현상이 아닌 DBR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사회적 이슈 중 하나이다. 꼰대는 어느덧 비용이 되어 이슈가 되고 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 현상을 초래하는 사람들 조차 자신에게 이익이 없음에도 계속해서 비용을 투자하며 꼰대 짓을 한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심리로 이러는 것일까?
그들이 하는 행위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차려와 억지로 먹이는 행위와 똑같다. 차라리 취향에 맞는 음식이면 다행이다. 맞지도 않는 음식을 강요한다. 그리고 본인은 만족해 한다.
이들의 기저에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열등감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로 인해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만족을 얻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 경험(?) 등을 전파하며 본인의 삶이 성공적이었다고 위안을 삼거나 자신이 남에게 조언을 해준다는 자체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대체로 실패 사례로 꼰대 짓을 하지 않는다.
이전에 한번 대학생일 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기업 채용 트렌드를 본 적이 있다. 조직 내 다양성 역량을 키우겠다면서, 여러 인종, 학교, 지역 등으로 채용을 했다. 심지어 학교를 다양성 중 하나로 보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조직 내 다양성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면 보장되는 것이다. 다양한(?) 인재를 채용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즉,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을 채용하면 자연스럽게 다양성이 있는 조직이 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단지 서로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며 싸울 뿐이다.
아무리 잘 만든 음식이라도 각자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 음식은 쓰레기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자. 먹고 싶은 음식은 각자가 고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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