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흔히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피엔스'를 읽으며 내가 오래 붙잡게 된 것은, 지식의 양보다 그 지식을 대하는 태도였다.
1편에서는 '상상의 질서'가 인류의 신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춰준 고마운 운영체였다고 이야기했다. 상상의 질서는 돈, 국가, 회사, 법처럼 우리가 함께 믿는 질서를 만들었고, 그 믿음 위에서 사피엔스는 대규모 협력을 해낼 수 있었다. 2편에서는 그 질서가 시간이 지나며 고정되고 파편화되면서, 오늘날에는 신뢰가 아닌 분열의 장치가 되는 순간이 많아졌다고 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분열 비용'을 지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독후감#19] 사피엔스 (1/3) - 상상의 질서 : '신뢰' 비용을 줄이는 인류의 운영체제
유발 하라리를 사실 개인적으로 엄청 좋아한다던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책에서 주는 인사이트 만큼은 보면서 종종 놀란다. 사피엔스 책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읽지는 않았는데우연히 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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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19] 사피엔스 (2/3) - 질서의 파편화 : 왜 상상의 질서는 신뢰가 아닌 분열의 장치가 되었는
1편에서 나는 '상상의 질서'가 인류의 신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춰준 고마운 운영체제(OS)였다고 설명했고, 이 관점에서 각각의 혁명을 분석하였다. 하지만 운영체제가 오래되면 버그가 생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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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다.
이 파편화된 질서를 우리는 어떻게 다시 연결하고, 다시 업데이트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실마리를 유발 하라리가 말한 세 번째 혁명, 바로 과학 혁명에서 찾고 싶다. 하라리는 과학 혁명 이후의 인류를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불만족스러운 신'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 신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었지만, 정작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하라리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과학 혁명을 통해, 우리가 지금의 파편화를 다시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보고 싶다. 그의 설명은 분명 강력하다. 너무 강력한 설명은 때때로 또 하나의 프레임이 되기 때문이다. 2편에서 말했듯, 그 어떤 질서 또는 프레임도 모든 진실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를 읽고
- 3편. 과학 혁명 : 파편화를 연결할 수 있는 기회 -
하라리의 말 : 과학 혁명의 핵심은 '무지의 발견'이다.
하라리는 과학 혁명의 핵심을 단순히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이 시기의 본질을 '무지의 발견'이라고 설명한다. 1편에서도 내가 짧게 예고했듯, 과학 혁명의 핵심은 결국 '지식이 늘었다'가 아니라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였다.
이 관점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과거에는 세상의 중요한 진리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믿었다. 신의 말, 현자의 말, 오래된 전통 등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과학 혁명은 이 전제를 바꾼다.
우리는 아직 모른다.
이 인정이 있어야 질문이 생긴다. 질문이 있어야 관찰과 실험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관찰과 실험이 가능해져야 기존의 질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답이 아니라,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는 가설이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하라리의 설명에 크게 공감한다. 왜냐하면 이 설명은 단지 역사 서술이 아니라, 인간이 질서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은 사건으로 과학 혁명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1편에서 내가 정리했던 문장을 다시 가져오면 이렇다. 과학 혁명적 태도의 핵심은 내가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하는 능력이다. 결국 과학 혁명은 '상상의 질서'를 부정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상상의 질서를 업데이트 가능하게 만든 시기에 가깝다. 1편에서도 나는 “우리는 모른다”라는 인정이 있어야 질문이 가능하고, 그 질문이 있어야 생각을 검증하고 수정하며 새로운 상상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정리했다.
비판적 시각
하지만 하라리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2편에서도 그랬듯, 하라리의 프레임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여러 비판적 의견이 있다. 과학 혁명을 "무지의 인정"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선명하다. 너무 선명하기 때문에, 현실의 복잡한 맥락을 다소 매끈하게 정리해버릴 위험도 있다.
예를 들어, 과학 혁명이 정말 오직 인식의 변화만으로 가능했을까? 유럽의 지리적 조건, 자원, 제국주의적 팽창, 자본의 축적, 군사 기술 같은 사회·경제 환경적 요소들은 분명 함께 작동했을 것이다. 즉, 과학 혁명을 순전히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로만 설명하는 것은 어느 정도 관념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더 크게 붙잡는 비판은 이쪽이다. 하라리의 설명 자체가 또 하나의 강력한 상상의 질서가 될 수 있다.
2편에서 나는 하라리의 세 가지 혁명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의견이 어쩌면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의 질서를 강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이 문장은 3편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상의 질서'라는 개념은 설명력이 너무 강해서, 모든 것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환원하고 싶은 유혹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다 이야기다.
결국 다 허구다.
결국 상상의 질서일 뿐이다.
이 말은 통찰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다. 권력, 폭력, 물질적 조건, 복잡한 역사적 맥락까지 너무 쉽게 하나의 설명으로 정리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피엔스에서 나타난 하라리의 관점을 이렇게 활용하고 싶다.
그의 설명을 유용한 렌즈로는 사용하되, 그 렌즈 자체를 절대적인 진리로 만들지는 않기.
과학 혁명에 대한 설명조차도, 계속해서 업데이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 역시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된다.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 질서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의심하지 못하는 권위가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 혁명적 태도가 아니다.
과연 불만족스러운 신이기만 할까
나는 오히려 과학 혁명을 바라보는 하라리의 시선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싶다.
물론 그의 말처럼, 인간은 과학을 통해 신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힘이 커졌다고 해서 곧장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불만족스러운 신이라는 결론으로만 이어질까? 과연 그것을 그렇게 불안한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맞을까?
나는 그 결론이 다소 빠르다고 느낀다. 오히려 문제는 인간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데 있다기보다, 무엇을 원하는지 함께 논의하고, 함께 수정해나갈 공통의 질서가 약해졌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하라리의 표현을 조금 다르게 읽어보면, ‘불만족스러운 신’은 단지 욕망이 끝없이 증식하는 인간의 모습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힘은 커졌지만 그 힘의 방향을 함께 조율할 상상의 질서가 파편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읽고 싶다. 과학 혁명은 분명 인간에게 자연을 설명하고 다룰 수 있는 더 큰 힘을 주었다. 문제는 그 힘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힘을 어디로,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공통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각 집단은 서로 다른 정의를 말하고, 서로 다른 진보를 말하며, 서로 다른 행복과 선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준들이 충돌할 때, 우리는 그 차이를 검토하고 수정하기보다 점점 더 빠르게 “누가 우리 편인가”를 먼저 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존재라기보다 무엇을 원하는지 함께 조율할 수 있는 질서를 잃어버린 존재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하라리의 ‘불만족스러운 신’이라는 표현을 허무주의의 결론으로 읽기보다, 상상의 질서가 파편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정한 위치를 보여주는 말로 읽고 싶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과학 혁명을 다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과학 혁명의 핵심이 ‘무지의 발견’이라면, 그 안에는 이미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우리는 틀릴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다.
나는 이 전제야말로, 파편화된 상상의 질서를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혁명은 우리에게 하나의 완벽한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정답을 다루는 방식을 바꿔준다.
- "우리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 "그러니 관찰해야 한다."
- "그러니 검증해야 한다."
- "그러니 수정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파편화된 질서 속에서도 다시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파편화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의견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서로를 업데이트 불가능한 존재로 취급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상대는 틀릴 수 있지만, 나 역시 틀릴 수 있다. 내가 가진 정보는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의 거대한 상상의 질서로 다시 모두를 묶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가 충돌하더라도 다시 대화할 수 있는 규칙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과학 혁명이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기존의 질서를 검토 가능한 가설로 바꾸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더 나은 설명으로 이동해가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파편화를 끊어낼 수 있는 중요한 힌트가 아닐까.
그래서 내가 과학 혁명에서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질서가 충돌하더라도, 다시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태도와 규칙이다. 나는 이 점에서 과학 혁명적 태도를 거대한 역사 서술에만 머무르게 두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지금 우리의 조직과 회의실, 그리고 일상의 관계 속으로 끌어오고 싶다.
어디서든 실천해야 할 과학 혁명적 태도
내가 생각하는 과학 혁명적 태도의 핵심은 여전히 같다. 나는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하는 능력. 이 문장이 살아 있는 집단은 반대 의견을 배신으로 읽지 않는다. 반대는 관계를 흔드는 위협이 아니라, 내가 놓친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된다. 반대로 이 문장이 죽어 있는 집단은 빠르게 경직된다. 겉으로는 의사결정이 빨라 보여도, 실은 업데이트가 멈춘 상태에 가깝다.
나는 이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바로 회의실이라고 생각한다. 회의는 단순히 결론을 내리는 자리가 아니다. 회의는 한 집단이 자신들의 상상의 질서를 어떻게 유지하고, 어떻게 수정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래서 어떤 조직의 회의 문화를 보면, 그 조직이 건강한지 아닌지가 꽤 선명하게 드러난다.
업데이트가 가능한 집단은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가진다. 수많은 개인의 생각과 데이터가 먼저 충분히 공유되고, 그 위에서 하나의 결정이 내려진다. 그리고 설령 개인적으로는 다른 의견이 있었더라도,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는 그것을 ‘누군가의 결론’이 아니라 ‘우리의 결론’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한다. 그 다음에는 실행 결과를 다시 돌아보고, 필요하면 기존의 판단을 수정한다.
이 흐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집단의 신뢰는 결론 자체보다, 그 결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공유되었는가에서 더 크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결론이라도, 공유 없이 내려진 결정은 쉽게 “누군가의 결정”이 된다. 그런 결론은 결과가 맞더라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남기기 어렵다. 사람들은 그 결정의 타당성을 믿기보다, 결정한 사람의 힘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조직은 보이지 않는 방어 비용을 치르기 시작한다.
반면 충분한 공유 위에서 내려진 결정은 다르다. 결과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적어도 그 결론이 어떤 데이터와 어떤 맥락 속에서 나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결론은 비로소 ‘우리의 결론’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의 질서는 다시 신뢰의 기반이 된다. 나는 건강한 집단이란 결국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유기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다른 의견이 존재할 수 있고, 그 의견이 공유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집단은 하나의 방향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 의견' vs '배신'
그런데 많은 집단은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반대 의견이 더 이상 검토할 데이터가 아니라, 분위기를 깨는 말이 되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리더나 다수의 확신에 균열을 내는 불편한 소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반대는 더 이상 반대가 아니라 배신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나는 이 지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집단에서든, 반대가 배신이 되는 순간 학습은 멈추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회의는 토론이 아니다. 이미 정해진 결론에 얼마나 빨리 정렬하는가를 확인하는 자리에 가까워진다. 겉으로 보면 빠르고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조직은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정의 기회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절약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낀 시간은 나중에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온다. 실수는 반복되고, 같은 문제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며, 사람들은 점점 더 솔직한 의견을 내지 않게 된다.
결국 조직은 더 많은 보고, 더 많은 절차, 더 많은 확인, 더 많은 감시를 통해 사라진 신뢰를 대신하려 한다. 나는 이것을 상상의 질서가 고장 났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다시, 1편에서 이야기했던 그 루프로 돌아가고 싶다.
파편화를 끊어내는 루프 : 공유 → 결정 → 실행 → 학습
이 네 단계는 단순한 업무 프로세스가 아니다. 내가 보기엔, 파편화된 상상의 질서를 다시 연결하는 최소한의 운영체제다. 공유가 있어야 서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결정이 있어야 집단은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실행이 있어야 결정은 현실과 만난다. 그리고 학습이 있어야 그 현실을 다시 질서의 수정으로 연결할 수 있다.
이 네 단계 중에서도 나는 마지막 학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습이 있어야만 질서는 단순히 굳어지는 제도가 아니라, 현실과 맞물려 계속 수정되는 살아 있는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학습이 가능하려면,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나는 틀릴 수 있다.
상대의 반대는 나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놓친 가능성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이 태도 없이는 학습이 불가능하다. 이 태도 없이는 업데이트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태도 없이는, 상상의 질서는 결국 다시 경직되고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과학 혁명을 단지 인류가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된 사건으로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질서를 다루는 방식, 즉 자신이 만든 질서를 계속해서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는 태도를 발명한 사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하라리가 말한 “불만족스러운 신”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 혁명은 인간을 허무한 존재로만 만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인간에게 불만족을 다루는 방법, 즉 질문하고, 검증하고, 수정하는 방법을 준 사건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다고 느낀다.
문제는 우리가 그 태도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질문하는 법을 몰라서도 아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서로를 더 이상 업데이트 가능한 존재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과학 혁명에서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나는 과학 혁명에서, 파편화된 질서를 단숨에 통합해줄 완벽한 해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질서가 충돌하더라도, 그 안에서 다시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태도와 규칙을 기대한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아주 작고 반복적인 습관에 가까울 것이다.
- 내가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것
- 상대의 의견을 먼저 알아보려는 것
- 반대를 곧바로 배신으로 읽지 않는 것
- 공유되지 않은 결론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유된 결론을 만드는 것
- 그리고 실행 이후 반드시 다시 배우는 것
마무리 : 신뢰 vs 분열
어쩌면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의 거대한 상상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 사이에서도 다시 연결을 시도할 수 있게 만드는 업데이트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상상의 질서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이유는, 그 질서가 사람들을 하나의 믿음 아래 묶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집단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그 협력을 통해 더 큰 미래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질서가 더 이상 수정되지 못하고, 반대가 배신이 되고, 공유가 사라지고, 학습이 멈추는 순간, 상상의 질서는 더 이상 신뢰를 싸게 만드는 인프라가 아니다. 그것은 같은 편끼리만 쉽게 믿고, 다른 편은 더 빠르게 배제하게 만드는 분열의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든 질서를 하나로 통일할 필요는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질서가 충돌할 때에도, 그것을 솔직하게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는 공통의 업데이트 규칙을 회복할 수 있다면, 상상의 질서는 다시 신뢰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긴 시리즈를 마치며, 나는 결국 이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된다.
우리는 지금 ‘사실’이 아니라 ‘소속’을 선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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