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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경영학에서 '백기사'는 M&A 상황에서 적대적 인수합병 공격을 받는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해주는 우호세력을 의미한다.

 

  다만 해당 글에서는 SNS 세대, 온라인 소통에 친숙한 세대들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을 의미한다. SNS 세대가 나타나기 전 개인의 고통과 행복은 인접 주변에만 대면으로 이루어졌다. SNS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의 삶은 온라인을 통해 공유되기 시작했고, 이는 비대면 상황에서 일면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공유되었다. 

 

  SNS의 힘은 놀라웠다. 단 하나의 글은 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곧 대중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전에는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만큼 부작용도 커졌다.

 

  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공감은 서로 간의 나이, 이름, 성격, 직업 이 뿐만 아니라 대화 당시 상황, 장소, 제스쳐, 어조 등 맥락적인 모든 의미를 담는다. 하지만 SNS는 다르다. 맥락적인 의미를 담기 어렵다. 그래서 순전히 내용만을 가지고 판단된다. 주목을 받기 위해 자극적이고 과장된 내용의 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익명성도 이에 결부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만들었다. 바로 '백기사'다. 우리가 상상하는 멋지고 정의로운 기사라기 보다는 무자비하고, 철저히 짓밟는 기사이다. 익명성을 토대로 참여자들의 도덕성은 폭력성과 같이 변질되었다.

 

  2016년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강남역 피해자를 위해 모인 이들은 도덕적인 목적에서 모였지만, 결국 피해자의 가족까지도 본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무참히 짓밟고 무시하였다. 그들은 백기사였지만, 백기사가 아니었다. 과연 이들은 누구를 위한 백기사였을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9090436010388

 

‘여혐 논란’ 속 강남역 피해자 가족은 뒷전

 

www.hankookilbo.com

 

  SNS 세대는 이러한 현상에 항상 노출되어 왔다. 그 노출이 강하든 약하든 노출되었고, 이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에게 부도덕한 면, 부족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이 부분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자비란 없다. 이들이 원하는 건 본인이 '백기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온라인 댓글에서 열리는 토론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끝없이 상대방의 논리에 허점을 찾거나, 말꼬리를 잡아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판다. 그 한가지만으로 상대방의 논리와 주장을 모두 허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의 토론의 의미는 없다. 시사 또는 정치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만 봐도 동일하다. 본인에게 유리한 부분만 편집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본인의 입맛에 맞는 것만 본다. 단지 본인들의 우월성, '백기사'를 입증하는 것이다.

 

  관심이 힘이 되는 시대에 진정한 백기사는 관심받지 못해 사라지고, 엉터리 백기사만 살아남고 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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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죽마고우가 몇 명 있다. 그 중 한명은 해산물을 싫어한다. 그리고 오이도 매우 싫어한다. 내가 이 친구에게 세계에서 제일 회를 잘 만드는 요리사가 직접 만든 음식을 제공하면 기뻐할까? 아니면 최고급 오이로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제공하면 좋아할까?

 

아무리 잘 만든 음식일지라도 내 친구에게는 라면 한 그릇만 못한 음식이다. 만약 이 친구에게 "넌 입맛이 왜 그래?", "먹어봐, 정말 잘 만든 음식이야", "맛있는데 넌 왜 그러니" 등 이런 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될까?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한우를 좋아한다. 충분히 그 가격을 지불하고 먹을 의향이 있다. 또 다른 내 친구도 한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가격을 지불하고 먹을 의향은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돼지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는다. 내 친구에게는 한우는 맛있지만 그저 비싼 음식일 뿐이다. 종종 친구들과 함께 먹거나, 누군가 사줄 때나 먹는 음식이다. 개인적으로 사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주변에서 왜 한우를 좋아하면서 사먹지 않냐고 물어보고 바보 같다고 비난하면 어떻게 될까?

 

모든 사람들이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로의 취향을 존중(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오랜기간 있었던 집단주의 문화의 영향일까? 그러나 집단주의의 의미는 개인의 의사와 이익보다 집단 전체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관점인 반면,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지금 문화는 전혀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되고 있다.

 

이는 단지 일부 현상이 아닌 DBR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사회적 이슈 중 하나이다. 꼰대는 어느덧 비용이 되어 이슈가 되고 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 현상을 초래하는 사람들 조차 자신에게 이익이 없음에도 계속해서 비용을 투자하며 꼰대 짓을 한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심리로 이러는 것일까?

 

그들이 하는 행위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차려와 억지로 먹이는 행위와 똑같다. 차라리 취향에 맞는 음식이면 다행이다. 맞지도 않는 음식을 강요한다. 그리고 본인은 만족해 한다.

 

이들의 기저에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열등감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로 인해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만족을 얻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 경험(?) 등을 전파하며 본인의 삶이 성공적이었다고 위안을 삼거나 자신이 남에게 조언을 해준다는 자체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대체로 실패 사례로 꼰대 짓을 하지 않는다. 

 

이전에 한번 대학생일 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기업 채용 트렌드를 본 적이 있다. 조직 내 다양성 역량을 키우겠다면서, 여러 인종, 학교, 지역 등으로 채용을 했다. 심지어 학교를 다양성 중 하나로 보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조직 내 다양성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면 보장되는 것이다. 다양한(?) 인재를 채용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즉,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을 채용하면 자연스럽게 다양성이 있는 조직이 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단지 서로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며 싸울 뿐이다.

 

아무리 잘 만든 음식이라도 각자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 음식은 쓰레기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자. 먹고 싶은 음식은 각자가 고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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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국가 차원이든, 회사 차원이든, 소규모 집단 차원이든 어디서든 알게 모르게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런 말을 우리는 종종 한다.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의무를 다 해라", "의무도 지키지 않는 것들에게는 권리는 없다." 그런데 과연 의무를 지켜야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의무를 지켜야만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무엇이 대체 먼저인 걸까?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 의무를 떠나서 태어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부여 받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존중할 의무 또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는, 가장 먼저 권리가 생기고 의무가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서로 함께 묶어 한 가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생각일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되고 양립해야 의미가 생기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사회에서는 권리보다는 의무가 선행되는 것으로 보는 인식이 더 많기는 하다. 왜냐하면 권리를 누린 뒤에 의무를 다하는 것과 의무를 다한 뒤에 권리를 누리는 것 중 후자가 더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정의 개념에 부합하기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먼저라고 해서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개 모두 항상 있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리가 없다고 해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해서 권리를 빼앗으려는 것 등 어느 하나가 없다고 다른 한쪽도 없애려는 생각은 바보 같은 짓이다. 권리와 의무 둘 다 없어서는 안 되고 꼭 필요하다. 다른 하나가 만일 없다면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 이는 곧 사회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훌륭하게 이행된 의무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리는 가질 가치가 없다."
마하트마 간디

 

집단 속에서 구성원으로 속해 있다면,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권리를 보장받는 여부를 떠나서 우선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만 권리를 요구할 자격과 명분이 생긴다. 왜일까? 권리를 받기 위해서는 '권리'라고 명명된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줄 수 있는 어떠한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권리는 앞에 올 수 없다. 의무가 먼저 올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의무를 통해 권리를 주는 주체에게 무언가 생겨야만 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국가에 납세의 의무(세금 등)를 다함으로써 보호받을 권리(치안) 등을 보장받는다. 권리 먼저 주기에는 치안에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 그리고 이 비용은 의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의무가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의무를 성실하게 하더라도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누구의 불찰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100%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마하트마 간디

 

그래서 그런지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무를 다하지 않고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권리가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흔히 권리와 자신의 이익 추구와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주장하고 이렇게 이야기 하곤 한다. "권리를 누릴 수 없으니, 의무를 지킬 책임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의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의무가 없는 권리는 이기주의이다.

 

다소 횡설수설하며 말하기는 했지만 결론은 두 개념은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기에는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두 개념은 동일시 되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안 되고, 중요도의 비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순서를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굳이 뭐가 먼저인지는 따질 필요는 없다. 그저 이 사실만 기억하면 좋겠다. 권리와 의무 모두 우리 모두가 지키며 동시에 누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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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나온 브루스 웨인(배트맨)과 그의 어릴적 소꼽친구 레이첼의 대화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말하고자 하는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물론 레이첼은 이 당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오해가 섞여 있다.).

 

입시를 경험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면접이었다. 논술을 통과하고 보는 면접이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합격했다는 큰 자만(?)에 빠져서 면접을 보았다. 그때 내 기억으로 면접 문제를 요약하자면, "동기가 좋은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와 동기는 불순하지만 결과가 좋은 경우" 두 가지를 비교하는 문제였다. 당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고, 단지 철학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지원했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 여러 사회 이슈들을 보면서 드는 사색이 이 질문과 어느정도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기와 결과에 초점을 맞춘 문제였기 때문에 관점은 다르다. 하지만 "과연 '사람에 대한 정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요소는 어떤 요소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옳은 것일까?

 

우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본질, 생각, 그 사람의 신념, 환경 등 여러가지 요소를 놓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행동'이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한 소아성애자 사람을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아동에 대한 성적 관심은 많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확실하게 아동에 대해서 성적 흥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육을 받으며,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억제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며 자신을 향해 웃는 아이, 자신에게 포옹을 해주는 아이, 뽀뽀를 해주는 아이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며 만족감을 얻어 왔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아동의 복지를 크게 개선시키고 수 많은 아이들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성인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고백을 한다. "사실 나는 소아성애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 파렴치한 소아성애자? 아니면 한 평생 아동을 위해 살아온 성인? 아니면 균형적으로(?) 소아성애자 본능을 억제한 성인?

 

실제 사례도 아니고, 극단적인 예를 든 내용이지만 쉽사리 답을 내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먼저 이 질문에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성적 능력'이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무조건 밥을 먹지 않고, 자고 싶다고 무조건 자지 않는다. 이성에 따라 법을 준수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발적으로 제약한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억제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의를 내릴 때 '행동'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습관 등 여러가지 요소에 의해 흐려질지는 몰라도 우리의 본질은 쉽사리 변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절대 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질, 본능 등으로 평가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논리적 비약이지만, 만일 그러한 요소를 중점적으로 평가하면 그 사람은 어차피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미 정의가 내려져 있기 떄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본능은 서로 거의 유사하며 사실상 파악하기도 어렵다. 이는 본능이 아닌 신념, 개인 가치 체계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는 별개로 '이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분해해보면, 본질(본능)에 따른 욕구 등이 형성되고 고 이후 이를 '이성'을 통해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결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행동(선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나온 브루스 웨인(배트맨)과 그의 어릴적 소꼽친구 레이첼의 대화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말하고자 하는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물론 레이첼은 이 당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오해가 섞여 있다.).

 

입시를 경험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면접이었다. 논술을 통과하고 보는 면접이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합격했다는 큰 자만(?)에 빠져서 면접을 보았다. 그때 내 기억으로 면접 문제를 요약하자면, "동기가 좋은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와 동기는 불순하지만 결과가 좋은 경우" 두 가지를 비교하는 문제였다. 당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고, 단지 철학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지원했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 여러 사회 이슈들을 보면서 드는 사색이 이 질문과 어느정도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기와 결과에 초점을 맞춘 문제였기 때문에 관점은 다르다. 하지만 "과연 '사람에 대한 정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요소는 어떤 요소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옳은 것일까?

 

우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본질, 생각, 그 사람의 신념, 환경 등 여러가지 요소를 놓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행동'이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한 소아성애자 사람을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아동에 대한 성적 관심은 많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확실하게 아동에 대해서 성적 흥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육을 받으며,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억제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며 자신을 향해 웃는 아이, 자신에게 포옹을 해주는 아이, 뽀뽀를 해주는 아이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며 만족감을 얻어 왔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아동의 복지를 크게 개선시키고 수 많은 아이들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성인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고백을 한다. "사실 나는 소아성애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 파렴치한 소아성애자? 아니면 한 평생 아동을 위해 살아온 성인? 아니면 균형적으로(?) 소아성애자 본능을 억제한 성인?

 

실제 사례도 아니고, 극단적인 예를 든 내용이지만 쉽사리 답을 내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먼저 이 질문에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성적 능력'이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무조건 밥을 먹지 않고, 자고 싶다고 무조건 자지 않는다. 이성에 따라 법을 준수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발적으로 제약한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억제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의를 내릴 때 '행동'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습관 등 여러가지 요소에 의해 흐려질지는 몰라도 우리의 본질은 쉽사리 변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절대 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질, 본능 등으로 평가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논리적 비약이지만, 만일 그러한 요소를 중점적으로 평가하면 그 사람은 어차피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미 정의가 내려져 있기 떄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본능은 서로 거의 유사하며 사실상 파악하기도 어렵다. 이는 본능이 아닌 신념, 개인 가치 체계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는 별개로 '이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분해해보면, 본질(본능)에 따른 욕구 등이 형성되고 고 이후 이를 '이성'을 통해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결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행동(선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본질에 따른 욕구와의 충돌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최종 단계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행동 이전 단계인 생각까지는 사실상 본질에 따른 욕구와 평행한 2개의 레일로 진행된다. 그리고 결국 행동(선택)이라는 하나의 레일로 합쳐질 때, 충돌하게 된다.

 

단순히 본질, 욕구, 판단 등을 보면 어떤 행동을 내릴 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행동(선택)이라는 레일이 계속 이어져 도달하는 곳이 바로 그 사람의 삶이고 인생을 나타내는 종착역이라는 점이다.

 

종종 우리의 주변에는 단순히 그 사람의 말로만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정의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평소에 이야기 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본심의 '유약함'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본심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여러 환경적인 요소에 무너지고, 심지어 더 나아가 본심이 처음에 안 그랬다는 듯이 왜곡을 하기도 한다. 나약한 우리의 본심은 쉽사리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저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누구나가 무단횡단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쓰레기를 버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다.

 

주제가 다른 곳으로 샌 것 같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행동'의 중요성이다. 본인의 생각, 본능 등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행동'이다. 생각은 천지차이일지라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생각은 동일할지라도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¹

 

변하고 싶으면 행동을 바꾸면 된다. 단지 생각에만 머문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¹ 그러나 '말', '언행' 또한 행동의 일환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다만, 위에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 경우 세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즉 직접적 행위, 간접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말'만 하는 것이 때로는 직접적인 행동인 경우가 있다. 그 말 자체가 직접적인 행위인 경우를 예를 들면, 학급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반 선생님 또는 또래 친구들에게 말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반대로 단지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위해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간접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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