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투 지구에서는 오전 8시에 9시까지 한 시간 동안은 '개인적인 용무'를 보는 시간으로 정했고, 깃발로 표시한 어떤 지역들은 양측 저격수로부터 안전하였다." - 당시 한 목격자의 증언 -
세계 2차 대전 당시 모종의 협력을 보여주는 한 목격자의 진술이다. 세계 1차대전 당시 여러 전선에 형성된 참호전에서 이러한 광경을 많이 지켜볼 수 있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많은 지휘관이 여러 시도를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로 배려하고 지휘관의 지시조차 무시하는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 모두가 평화주의자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지독한 이타주의자였기 때문일까?
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발생한 일이었다. 책에서는 이 사례에서 나타난 협력의 전략을 '팃포탯 전략'이라고 말한다. 팃포탯 전략이란 우선 상대방에게 협력을 하고 그 이후부터는 상대방이 이전에 행한 전략을 그대로 하는 전략이다. 즉, 우선 협력을 한 뒤, 상대방이 배신을 하면 배신하고, 협력을 하면 계속 협력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다.
이 책은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앞으로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언제 그와 협력을 하고, 또 언제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까?"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
이 책은 많은 학자들과 여러 분야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당연히도 협력은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더욱 인상 깊은 것은 협력을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협력은 우리에게 각자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돕는 행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르게 접근한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략으로 바라본다. 흔히 알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기반으로 과연 협력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어떻게 이루어져야만 가장 효율적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낸다. 그러기 위해 컴퓨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대회를 실시한다. 죄수의 딜레마를 기본 원리로 하여 과연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 프로그램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가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 무엇이 공공선인가?'이다.
처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었을 때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만큼 화두를 던지는 책이었고, 생각의 틀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사실 아쉽다.
단순히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에 비해 비평적으로 변했는지 모른다.)
능력주의의 폐해는 누구나 사실 알고 있다. 다만 대안이 없을 뿐이다.
사실 그 어떤 것에도 문제는 있다. 그걸 어떻게 보완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부제 :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공정하다는 착각"은 마이클 샌델이 저술한 책으로, 능력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능력주의 아래 굳어진 ‘성공과 실패에 대한 태도’가 현대사회에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에 대한 깊은 비판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신화는 자신의 성공을 오로지 자신의 노력의 댓가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했거나 그대로 자신의 자책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승자들은 능력주의 인식 아래에서 끝없는 경쟁의 압박에 짓눌려 사는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과되는 가혹한 잣대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시각에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하면서도 정의로운가를 질문하며 공공의 선을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공정과 우리사회의 모습
'공정'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이 공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으며, 노력한 만큼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전제를 깨는 불공정에 대해 가장 분노해 왔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능력주의'는 그렇게 발전해왔고,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정하다'는 명목 아래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한 만큼 결과를 가져가는 사회라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만일 저소득층 대부분이 덜 노력했고, 상류층 대부분이 더 노력해서 나온 결과라면 납득할 수 있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를 한국 상위 10%의 자산점유율은 58.5%, 하위 50%는 5.6%이다. 과연 한국사회의 상위 10%는 하위 50%보다 그만한 노력을 더 해서 더 많은 자산을 취득한 것일까? 능력주의의 전제 조건인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는 실제로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1 사회조사'를 보면 계층 이동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1년 32.2%에서 '19년 22.7%까지 줄었고, 올해 조금 상승하여 25.2%를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지난 10년간 계층 이동 가능성은 하향 추세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층일수록 계층 이동가능성이 55.9%로 크다고 보고, 중층은 30.6%, 하층은 14.9%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깨지고 있다. 능력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미국조차 OECD 국가 중 높은 사회 불평등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잘못된 것인가? 능력주의를 없애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정의로워지는가?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도 없다.
능력주의
능력주의의 본질은 결국 '경쟁'이다. 기회의 공정이 보장된다면, '능력이 좋은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가는 것이 옳다.'라는 전제가 되어 있지만, 이 전제에는 '타인보다'라는 기본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언뜻 보면 경쟁심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식당 줄을 먼저 선 사람이 더 빨리 입장하는 것처럼 매우 당연한 사실이다. 사실 능력주의 자체에는 그렇게 문제가 없다. 노력 이외의 다른 요소(재산, 재능, 우연 등)가 능력주의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이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
사실 능력주의의 폐해는 '획일화'로부터 시작된다. 각자의 행복과 성공은 그 기준이 다름에도 소득으로 획일화하고, 학창시절 이를 위한 경쟁요소를 대학교 입시로 두면서 학벌주의 등이 생겨났다. 그 결과 자연스레 책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능력주의에서 승리한 자는 '오만함'을 패배한 자는 '패배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마이클 샌델은 이 부분을 가장 경계하였다.). 대학교 입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
능력은 성공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한 가지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능력주의의 폐해
결국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획일화로부터 비롯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에서 벗어나면 곧 그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러 부작용이 생긴다. 열등감 유발, 선택권 제한, 불평등, 공정하다는 착각 등이다.
1. 소외 계층의 열등감 유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하며, 그 책임 또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있다.
2. 개인의 선택권 제한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재능을 강조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거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오히려 선택권을 제한한다. 예를 들면,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축구 재능이 부족하니 더 이상 축구를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것이 그 예시이다.
3. 결과의 불평등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큰 보상을 얻고, 패배한 사람은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불평등을 낳을 수 밖에 없다.
4. 공정성의 착각
능력주의에 기반한 모든 일은 공정하다는 착각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능력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 함에도 능력으로 포장된 출신 학교, 가족, 집안 배경 등 능력과는 다른 외적 요소에 의해 왜곡된다.
능력주의의 대안
하지만 문제는 능력주의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효율적인 가치관 중 능력주의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능력주의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에 대한 비판도 이 시각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과연 새로운 대안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과연 그가 이야기하는 능력주의에서 벗어나 이루어야 할 공공선은 무엇일까? 자칫하면 결과의 평등으로만 보여질 수 있기에 더더욱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즉,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능력주의의 대안이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니다. 개념적으로 다원적 능력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제시한 이론으로, 개인이 가진 여러 가지 능력 중 특정 능력이 뛰어나다는 개념이다. 가드너는 인간의 두뇌가 8가지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언어, 수리-논리, 시각-공간, 체감-운동, 음악, 대인, 자기 이해, 자연 이해 등이 포함되고, 이 중 하나 이상의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찾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원적 능력주의 또한 능력주의의 기준이 여러가지로 바뀐 것일 뿐 능력주의와 그 본질은 똑같다.
또한 다원적 능력주의는 한 국가 차원에서 본다면 원활히 돌아갈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 와 닿는 집단 차원에서는 적용이 어렵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일하고 있는 기업에서 다원적 능력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음악적 재능이 있는 직원도 우대받고,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직원도 우대받을 수 있을까? 즉, 국가 차원에서는 다원적 능력주의가 가능할 지는 몰라도 한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긴 쉽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각 개인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결코 다원적 능력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의 입장에선 다원적 능력주의도 능력주의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에 동감한다. 다만 다원적 능력주의만한 대안은 현재 없다고 생각한다.
다원적 능력주의 그 너머
다원적 능력주의도 결국 그 본질은 능력주의이고, 부작용 또한 있지만 이만한 대안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식당 줄을 먼저 선 사람이 더 빨리 입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기 때문이다(물론 식당 줄을 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식당이 크다면 모두가 줄을 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에서 그건 이뤄지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도 능력주의의 폐해를 사후에라도 보완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다. 예를 들면, 능력주의에 따른 성과(급여)를 차등하여 세금을 거두고 이를 재분배하여 어느정도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렇듯 능력주의 자체의 부작용을 없앨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해소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양성'과 '존중'이다. 개인의 자율과 희망에 따라 자유롭게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대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분야에서의 기회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서 이를 얻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다양한 기회를 얻기에는 그 비용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교육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의 능력을 찾는 기회를 얻고 사회에서는각 개인이 찾은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능력주의의 폐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설사 이렇게 된다 할 지라도 100%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담보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없는 사회가 어디 있는가, 조금씩 조금씩 문제를 찾아 개선해 나가면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그저 담담한 문장으로 노인이 물고기를 잡는 단순한 스토리를 그려냄에도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치열한 노인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치열한 삶을 동경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 어떤 동기부여 책보다 최고의 동기부여 책일 수 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우리의 삶은 치열해야 한다.
단순한 낚시꾼의 이야기를 넘어선 삶과 그 본질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시카고 근교에서 태어나 의사의 아들로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풋볼 선수로 활약하다가 졸업 후 기자 생활을 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참전하고 훈장을 받았으며, 1936년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했다. 작가로서 헤밍웨이는 초기에 무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명성이 커졌고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실제로 그는 낚시를 좋아했는데 청새치 낚시를 하며 이 작품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통해 헤밍웨이는 1953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고, 이후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비록 짧고 매우 단순한 줄거리지만, 헤밍웨이가 심혈을 기울인 만큼 작품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준다.
바다에서 펼쳐지는 노인의 투쟁
우선 소설에서는 어부인 산티아고와 그를 존경하는 소년 마놀린이 등장한다. 주요 인물은 단 2명이고,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사색, 대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품에서 산티아고는 낚시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잡지 못한 지 84일이 지났음에도 의지를 잃지 않고, 매일 낚시를 하러 나간다. 그런 산티아고를 마놀린은 40일 동안 함께 하지만 이후 부모님이 산티아고 배에 타는 것을 금지시켜 함께 하지 못하게 된다. 배에는 함께 타지 못했지만, 마놀린은 아침에 산티아고를 찾아가고 출항을 도와준다.
바다 위에서 노인은 새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고,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린다. 그러던 중 매우 큰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고, 그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적절히 낚싯줄을 쥐고 풀며 물고기를 유도한다. 하지만 노인의 배가 끌려 다닐 정도로 물고기의 힘이 매우 강했고,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노인은 물고기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손이 쥐가 날 정도로 오랜 시간 낚시줄을 붙잡고 있다. 결국 오랜 장기전 끝에 물고기가 몸을 드러내는데 노인이 탄 배보다 클 정도로 매우 큰 물고기였고, 대단한 물고기라고 감탄을 하며 형제애를 느끼지만 마지막엔 죽여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세 번째 아침 날이 되어서야 노인은 작살로 물고기의 숨통을 끊고, 배로 물고기를 끌어 항구까지 이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고, 노인은 격렬히 저항을 하지만 점차 물고기는 상해가기 시작한다. 한밤 중에 항구에 도착하자 지친 노인은 자신에 집에 들어가 잠들고, 마놀린은 그의 상처 난 손을 보며 마음을 아파한다. 사람들은 노인의 배에 묶여 있는 물고기의 뼈를 보고 놀란다. 노인이 깨어난 후, 마놀린은 다시 노인에게 낚시를 가르쳐 달라 말하고 노인은 낮잠을 자며 사자 꿈을 꾸며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존경해야 할 산티아고의 삶, 투쟁의 삶
해밍웨이는 작품 '노인과 바다'를 “평생 바쳐 쓴 글이자 내가 가진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00회의 탈고를 했다고 한다. 마치 노인과 같이 쓴 작품이 세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완성시킨 것이다.
먼 바다에서 펼쳐지는 노인의 사투를 그린 이 책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한 노인의 투쟁과 의지를 매우 절제된 문장으로 강렬하게 표현했다. 문학적으로 절제된 표현도 좋지만 나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까닭은 바로 '투쟁'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항상 삶의 성공을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바보 같이도 그 성공을 남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한다.
산티아고(노인)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지만, 매일 매일을 투쟁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물고기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노인을 비웃는 그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모습일 지 모른다. 삶은 치열한 투쟁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그 결과를 확인하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노인의 삶처럼 얼마나 투쟁하고, 치열했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 극 중에서 가장 순수한 아이인 마놀린은 노인의 삶을 존경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가장 치열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아이가 노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치열한 삶을 살수록 동시에 그 삶을 포기하고 노인을 비웃던 주변 사람들처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어린시절 일어서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사자의 의미
또한 산티아고는 항구에서 출발하기 전, 그리고 돌아왔을 때 사자 꿈을 꾸는데 이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이겨내는 용기를 상징한다. 추가로 산티아고가 대어를 낚는 복선이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상어에게 모두 빼앗겨 뼈만 남은 것을 볼 때 그 어떤 역경에도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고 느껴진다. 대어를 낚든 그 어떤 물고기를 낚든 항상 치열하게 맞서는 것이다.
책에서 비유로 활용된 사자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영토 분쟁, 새끼 사자 보호, 사냥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쉼 없이 달리는 사자의 삶은 투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산티아고의 말
작가의 생각은 산티아고의 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이놈에게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를 보여주겠어." 지금까지 그는 그 증명을 수천 번이나 해왔지만, 결국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노인은 이제 또 다시 자기 말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몇 번이라도 상관없다. 기회란 그것을 잡는 자에게 항상 새로운 것이니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희망을 버린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어"
"물고기야." 노인은 말했다. "난 널 사랑하고 또 무척 존경한단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기 전에 널 죽이고 말겠다."
노인과 바다에선 바다라는 거대한 삶에서 노인이 역경을 의미하는 물고기를 대하는 자세를 통해 삶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역경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의지를 가지고 치열하게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볼 뿐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적당히"라고 이야기하며, 치열한 삶을 더 이상 동경하지 않게 되었다. 삶에 찾아오는 역경을 환경 탓으로 돌리며 회피하는 경우도 많았다. 적당히 살아가는 삶이 나쁜 건 아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 뿐 그 누가 더 옳고 그르다 할 수 없다.
그저 만일 노인의 삶에서 묘한 동경심이 느껴졌다면 한번쯤 그렇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치열한 삶을 살수록 우리 삶은 더욱 생기가 돈다.
기계적 패러다임(테일러리즘), 인간관계적 패러다임, 경영전략적 패러다임, 노동지향적 패러다임 등 4가지 패러다임 모두 인사 커리어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몇몇 시사점을 준다. 단, 아래 내용은 본인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각자 생각하는 시사점을 정리하면 좋다.
테일러의 과학적 방법론을 생각해보면 성과급 제도는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나온 제도이다. 즉, 일의 의미와 성과급 간의 교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가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기업에서 성과급을 다른 기업 대비 많이 줄 수 없다면 직원들에게 자율성을 최대한 부여하여 일의 의미를 직원들이 찾도록 하여 기업의 매력도를 높일 수 있다.
호손공장의 실험을 통해 알게 된 비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은 결국 회사와 직원의 관계, 직원들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준다. 비경제적 요인의 목적은 회사와 직원의 금전적 계약 관계를 돈독히 하기 보다는 일종의 회사와 직원의 사회적/심리적 관계를 증진시키는데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비경제적 요인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회사와 직원 간 관계로 생각해야 한다.
경영전략적 패러다임(인적자원) 관점은 특히 직원의 이탈방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직원들의 이탈방지는 강제적으로 할 수 없는 사항이기에 곧 회사의 매력도가 중요하다. 이는 곧 핵심인력의 확보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인적자원관리의 핵심은 '어떻게 회사의 매력도를 높이느냐'에 있다. 즉, 인사담당자는 더 이상 HR 기능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통합적인 관점에서 회사를 바라보고 제언할 줄 알아야 한다.
노동지향적 패러다임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관점은 사실상 기업에서 실현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노동지향적 패러다임이 직원들이 가지는 인식일 수 있다는 점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회사에 대한 직원의 기대수준, 인식 등은 동기부여 관점에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회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은 구시대적 발상으로 직원들은 회사보다 본인의 삶을 가장 우선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과연 회사의 이익과 직원들의 삶의 균형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노동지향적 패러다임은 기계적 패러다임 방식에 대한 저항에서 나왔다. 실용주의적 관점 보다는 규범주의적 관점으로 인간의 존엄성 측면에서 자본가와 직원이 동일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게 핵심 주장이다.
이전 패러다임이 모두 방향은 다를 지라도 근본적으로 회사 이익 추구 관점이었다면, 노동지향적 패러다임은 직원의 이익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직원의 고용안정, 직원을 위한 근무환경 설계, 임금 증대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는 있다.
직원의 만족이 곧 회사의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직원 만족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직원의 만족이 우선이고, 회사의 성과가 발전하는 건 그 후이다.
이 패러다임의 가장 큰 목표는 노동자들의 복지와 만족도를 높여 조직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 5가지를 주요 원칙으로 삼는다.
1. 공정한 대우 : 노동자들이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장하고 보상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불공정한 대우를 최소화 2. 개인의 발전 지원 : 교육과 훈련, 직무 개발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성장과 능력 향상 3. 노동자의 참여와 소통 :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정보와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 4. 안정적인 고용과 노동조건 : 안정적인 고용과 경쟁력 있는 급여, 복지 혜택을 제공하며,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 5. 인간중심의 조직문화 : 노동자들의 존중과 인간성을 중시하는 조직문화를 유지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
이 관점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연 노동지향적 패러다임을 가진 기업이 다른 기업들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겠는가에 있다. 직원들에게 아무리 좋은 기업일지라도 그 기업이 다음날 사라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다시 자본지향적 관점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기업의 생존은 회사와 직원 모두에게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