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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책이고, 읽은 지 오래된 책인데 최근에 다시 읽고 정리해 보았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오랜 기간 지속된 화두에 대해 핵심적인 부분을 잘 정리하고, 본인의 생각을 잘 서술한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 Justice - 
 
(1) 공리주의와 자유 지상주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옳은 행동은 정의이고, 옳지 못한 행동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가 과연 단순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면,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살아간다. 다만 각자의 정의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전히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있다.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도 동일한 고민을 담고 있다. 여러 딜레마와 함께 '공리주의', '자유 지상주의', '공동체주의' 3가지 개념을 비교하며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연 정의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났다.
 
블로그 글을 적으며, 두 가지 글귀가 떠올랐다. 돈키호테의 명언과 만화 원피스의 돈키호테의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도 아닌 정의일세."
(Cambiar el mundo, no es ni utopía ni locura, es justicia.)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

 

"해적이 악, 해군이 정의? 그런 것 따윈 얼마든지 뒤엎어져 왔다.
평화를 모르는 아이들과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의 가치관은 달라
정점에 서는 자가 선악을 뒤짚는다. 지금 이 장소야 말로 중립이다.
정의는 이긴다고? 그거야 그렇겠지!
승자만이 정의다!"
- 만화 원피스 556화 중(해군과 해적 간 대규모 전투 상황)

 
 
첫 번째 정의 : 공리주의

책에서 말하는 정의의 첫 번째 개념은 바로 '공리주의'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장 선하다는 이 개념은 언뜻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장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테러리스트 고문' 문제를 생각하면 정의롭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테러리스트가 숨겨논 폭탄을 찾기 위해 테러리스트의 딸을 고문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우리는 다수의 시민의 안전을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테러리스트의 딸을 고문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공리주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이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공리주의에 빠질 경우, 자칫 개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이면에는 곧 소수의 피해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연 행복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을까? 공리주의가 '정의'에 가장 적합한 개념일 지라도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이며, 그리고 밀의 주장처럼 행복의 질도 구분할 것인지도 고민을 해야 한다.
 
 
두 번째 정의 : 자유 지상주의
 
그 다음은 '자유 지상주의'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것이다. 즉, 정의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칸트의 정언명령, 존 롤스의 정의론 등 각각의 차이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자유 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용인할 수 없는 행위들이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대리모 계약을 통해 아이를 얻는 행위는 서로 원하는 것이지만 그 행위가 정의롭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과연 이것이 진짜 개인의 '자유'에 의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리모 계약을 맺는 주체들은 과연 자유에 의해서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일까? 부득이한 상황 등에 의해 벌어지는 상황인 만큼 온전히 자유라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유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는 수 많은 비도덕적 행위와 불평등은 정의롭게 보이지 않는다.

 

칸트는 이에 '정언명령'이라는 개념을 추가해서 말한다. 정언명령이란 어떠한 목적, 상황, 성향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명령으로 그 행동 자체로 바람직한 것을 의미한다. 대리모 사례는 돈이라는 요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언명령에 부합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정언명령의 구분법으로 보편적 법칙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보면 정언명령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존 롤스는 개인의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무지의 장막' 개념을 통한 가상의 계약으로 정의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무지의 장막이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맺어지는 계약이다. 이 상황에서는 자신이 불합리한 상황에 놓일 것을 우려하여 원칙들을 세우고 동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 시스템이 필요하다' 등의 원칙이 세워지게 된다.

 

 

공리주의와 자유 지상주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알아봤지만, 정의의 개념으로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한편으론 정의의 개념에 두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정의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그렇다면 과연 마이클 샌델은 어떤 정의를 말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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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rdongdong.tistory.com/68

 

[독후감#17] 협력의 진화(1/3) - 새로운 협력의 개념 /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오래 전 읽은 책이지만 이제야 다시금 읽으면서 하나씩 정리를 하고 있다. 그 만큼 명작이고, 새로운 관점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독후감을 크게 ①협력의 개념, ②최고의 협력 형태, ③시사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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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17] 협력의 진화(2/3) - 최고의 협력 형태 /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https://hrdongdong.tistory.com/68 [독후감#17] 협력의 진화(1/3) - 새로운 협력의 개념 /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오래 전 읽은 책이지만 이제야 다시금 읽으면서 하나씩 정리를 하고 있다. 그 만큼 명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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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진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특히 한 집단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다면 특히나 더 봐야 하는 책이다.

 


 

'협력의 진화'를 읽고

- 이기적인 개인의 팃포탯 전략 - 

 

(3)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성공의 비결은 '승리'가 아닐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경쟁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축구 게임처럼 한 쪽이 이기고 한 쪽이 지는 제로섬 게임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심지어 실제로 제로섬 게임이 아닐 지라도 우리는 제로섬이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지는 것을 극도로 기피한다.

 

  팃포탯 전략은 상대보다 잘하지 못함에도 최종적으로 승리를 가져가는데 그 의의가 크다. 좋은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을 찾아 협력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경쟁이 아닌 협력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협력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인 성공의 지름길이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고 특정 집단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사 주어진 규칙(방식) 자체가 경쟁 방식일 지라도 그 규칙에 매몰되지 않고,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팃포탯도 결국 높은 점수가 이기는 경쟁 방식이었지만, 상호협력을 통해 이겨냈다.

 

  나는 종종 웹툰이나 만화를 볼 때, 인상깊은 대사 등을 기억하곤 하는데 문득 '신의 탑' 웹툰 5화의 아래 대사가 생각났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도 한다면 어떨까?

 

"나는 이 시험의 룰을 듣는 순간 이렇게 생각했지. 분명 누군가는 다른 200명을 제거하고 시험을 통과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 200명을 죽일 때 남은 200명을 동료로 만들겠다고."
- 네이버 웹툰, '신의 탑' 5화 중(400명 중 200명만 남는 서바이벌 게임 상황) -

 

 

상호협력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하지만 혼자만 팃포탯이라면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상호협력의 공고한 연대를 만들고, 팃포탯이 이익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만 한다. 환경만 조성되면 자연스럽게 팃포탯은 톱니바퀴처럼 그 효과가 지속되고 점진적으로 강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이 있다. 우선 개인 관점으로 보자면 본인부터 팃포탯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즉, 상호협력을 우선적으로 하되 배반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보복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과 주변에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올디(무조건 배반하는 자)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상호협력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집단이든 특정인과 문제를 일으키기 보다는 협력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추가로 협력의 진화 책 등을 집단 내 공유한다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알릴 수 있고, 팃포탯을 활용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수 있다. 자연스럽게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관계에서 그 효과가 더 극대화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거나 또는 그러한 관계가 있는 집단 내에서만 상호협력 전략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좋다. 정기적인 만남의 자리를 통해 관계를 맺거나 업무 프로세스 상 자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도록 환경을 구축할 수도 있다. 추가로 조직 내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관계 형성에 신경을 쓰도록 만들 수도 있다. 간접적이지만 평판을 통해 해당 사람의 의견이 계속해서 본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호협력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현재보다 미래를 더 가치있게 만들어야 한다. 어느 집단이든 발전을 위해선 성장 또는 성공에 따른 보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크기는 당장 눈앞에 크게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더 크도록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당장의 인센티브보다 승진에 따른 보수 향상이 훨씬 크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인 관계를 더 신경쓰기 때문이다. 

 

 

팃포탯은 카르텔이 아니다.

 

  이 부분은 사실 시사점이자 조언을 하는 부분이다. 팃포탯은 잘못되면 카르텔처럼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팃포탯은 카르텔이 아니다. 팃포탯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 차이가 분명하다.

 

  팃포탯은 신사적이며, 다른 집단 또는 개인에게 협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명료하게 그 특성을 보여주고, 관계 또한 미래지향적이다. 반면 카르텔은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침범하고, 그 방법 또한 정당하지 않다. 그렇기에 다른 집단과 개인에게 '복종' 또는 '저항'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 또한 카르텔은 그 확장성 또한 매우 작다. 카르텔이 과해질 경우, 집단 내 이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팃포탯과 달리 배타적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은밀하게 형성된 카르텔은 집단 내 이익을 갉아 먹는다.

 

  실생활에서 팃포탯을 하기 위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카르텔의 모습을 띠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분하는 법은 어쩌면 단순할 수 있다. 과연 협력을 불러 일으키는가 아닌가이다.

 

 

팃포탯의 보며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

 

  리처드 도킨스가 쓴 '협력의 진화'를 위한 추천의 글을 보면, 그는 이 책을 만나는 사람마다 추천했다고 한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세계의 지도자들까지 이 책을 읽으면 보다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처럼 이 책은 많은 함의를 담고 있고,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경쟁 환경을 협력 환경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누군가는 경쟁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지만 팃포탯 또한 그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누군가와 협력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도움을 줄 수도 없다면 자연스럽게 팃포탯 환경에서도 도태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본질적으로 팃포탯은 경쟁보다 더 잔인할 수 있다.

 

  책에서는 서로의 보상이 동일한 죄수의 딜레마를 가정했지만, 실제는 다르다. 누군가는 다른 이에게 더 많은 보상을 줄 수 있고, 누군가는 도움을 주더라도 보상을 기대하지 못할 상황일 것이다. 즉, 팃포탯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항상 하고 있는 것이다.

 

"넌 내가 협력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조금씩이라도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팃포탯이라는 전략을 사용할 조건은 갖출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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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17] 협력의 진화(1/3) - 새로운 협력의 개념 /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오래 전 읽은 책이지만 이제야 다시금 읽으면서 하나씩 정리를 하고 있다. 그 만큼 명작이고, 새로운 관점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독후감을 크게 ①협력의 개념, ②최고의 협력 형태, ③시사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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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이 이기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라면, 그럼 어떤 협력의 형태가 가장 효율적일까? 

 



'협력의 진화'를 읽고
- 이기적인 개인의 팃포탯 전략 -

(2) 최고의 협력 형태

 

컴퓨터 프로그램 대회 결과

  반복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효과적인 선택을 조사하기 위한 컴퓨터 대회가 열렸다. 참여 프로그램은 협력, 비협력을 결정할 수 있으며, 결과에 따라 점수를 얻어가는 방식이었다. 첫 대회에서는 총 14개의 프로그램이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수학, 사회학 분야에서 출품되었다. 그 결과 가장 뛰어난 프로그램은 팃포탯 프로그램으로 판명되었다. 이후에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었다.

  대회 결과를 분석한 결과 점수가 높은 프로그램과 아닌 프로그램의 차이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 '신사적 특성'이었다. 또한 추가로 특이한 점은 끝까지 복수만 하는 프로그램 보다는 용서를 가진 팃포탯이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팃포탯의 특성

  결과적으로 가장 단순한 팃포탯이 강력한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다. 여러 환경에서 팃포탯의 특성을 분석한 결과 팃포탯이 강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사적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문제에 휘말리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보복적인 면모도 있기 떄문에 상대의 배반을 억제한다. 관대함도 있기 떄문에 배반한 상대와의 상호협력도 금방 회복된다. 마지막으로 규칙이 명료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장기적인 협력을 이끌어낸다.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팃포탯은 실생활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보일 수 있다. 우선 팃포탯을 만날 가능성이 커야 한다. 단, 한 번만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진행한다면 배반하는 게임이 많을 것이다. 여러차례 게임을 진행해야 팃포탯의 효과가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과 관계가 여러차례 이루어지는 집단 내에서 팃포탯은 더욱 강력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팃포탯을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팃포탯의 강점 중 하나는 협력을 하지 않으면 보복 당한다는 사실을 상대 프로그램이 쉽게 인지한다는 점에 있다. 이로 인해 상대는 배반은 결국 본인의 손해라는 것을 깨닫고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특이상황에서의 팃포탯

  팃포탯이 가지는 특성에 따라 팃포탯이 취약한 몇 가지 상황도 있다.


  첫 번째, 상대방의 약점이 있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경우이다. 이 경우 협력을 중단해야 한다. 설사 팃포탯 자신에게 우호적일지라도 먼저 배반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장기적 상호작용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팃포탯을 가장 강력하게 지탱해주는 상호협력이 사라지게 된다.

  두 번째, 상대의 배반을 응징할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 배반을 즉시하지 않으면, 팃포탯의 명료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프로그램도 등장할 것이다. 그러면 팃포탯의 위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나머지는 다 올디(무조건 배반)인 반면, 혼자만 팃포탯인 상황이면 안된다. 혼자만 팃포탯인 상황이라면, 팃포탯은 살아남을 수 없다. 올디의 최초 배반 이후 계속해서 서로 배반만 하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획득할 수 없다. 근데 올디의 집단에 팃포탯 집단이 침투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팃포탯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결국 올디를 이기게 된다. 즉, 이기적인 문화를 가진 사회도 어느순간 협력의 문화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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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읽은 책이지만 이제야 다시금 읽으면서 하나씩 정리를 하고 있다. 그 만큼 명작이고, 새로운 관점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독후감을 크게 ①협력의 개념, ②최고의 협력 형태, ③시사점 3가지 형태로 정리할 예정이다. 다만 글을 읽기 전 아래 게임을 해보기 바란다.
 
https://osori.github.io/trust-ko/

The Evolution of Trust

an interactive guide to the game theory of why & how we trust each other

ncase.me

 
본인이 직접 해본다면 이 책의 내용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협력의 진화'를 읽고
- 이기적인 개인의 팃포탯 전략 -
 
(1) 새로운 협력의 개념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의 선택
 

"어떤 전투 지구에서는 오전 8시에 9시까지 한 시간 동안은 '개인적인 용무'를 보는 시간으로 정했고, 깃발로 표시한 어떤 지역들은 양측 저격수로부터 안전하였다."
- 당시 한 목격자의 증언 -

 
  세계 2차 대전 당시 모종의 협력을 보여주는 한 목격자의 진술이다. 세계 1차대전 당시 여러 전선에 형성된 참호전에서 이러한 광경을 많이 지켜볼 수 있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많은 지휘관이 여러 시도를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로 배려하고 지휘관의 지시조차 무시하는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 모두가 평화주의자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지독한 이타주의자였기 때문일까?

  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발생한 일이었다. 책에서는 이 사례에서 나타난 협력의 전략을 '팃포탯 전략'이라고 말한다. 팃포탯 전략이란 우선 상대방에게 협력을 하고 그 이후부터는 상대방이 이전에 행한 전략을 그대로 하는 전략이다. 즉, 우선 협력을 한 뒤, 상대방이 배신을 하면 배신하고, 협력을 하면 계속 협력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다.
 
  이 책은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앞으로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언제 그와 협력을 하고, 또 언제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까?"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

  이 책은 많은 학자들과 여러 분야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당연히도 협력은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더욱 인상 깊은 것은 협력을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협력은 우리에게 각자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돕는 행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르게 접근한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략으로 바라본다. 흔히 알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기반으로 과연 협력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어떻게 이루어져야만 가장 효율적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낸다. 그러기 위해 컴퓨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대회를 실시한다. 죄수의 딜레마를 기본 원리로 하여 과연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 프로그램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가이다.
 
  과연 협력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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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 제목은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 무엇이 공공선인가?'이다. 

 

처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었을 때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만큼 화두를 던지는 책이었고, 생각의 틀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사실 아쉽다.

단순히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에 비해 비평적으로 변했는지 모른다.)

 

능력주의의 폐해는 누구나 사실 알고 있다. 다만 대안이 없을 뿐이다.

사실 그 어떤 것에도 문제는 있다. 그걸 어떻게 보완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부제 :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공정하다는 착각"은 마이클 샌델이 저술한 책으로, 능력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능력주의 아래 굳어진 ‘성공과 실패에 대한 태도’가 현대사회에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에 대한 깊은 비판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신화는 자신의 성공을 오로지 자신의 노력의 댓가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했거나 그대로 자신의 자책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승자들은 능력주의 인식 아래에서 끝없는 경쟁의 압박에 짓눌려 사는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과되는 가혹한 잣대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시각에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하면서도 정의로운가를 질문하며 공공의 선을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공정과 우리사회의 모습

 

'공정'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이 공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으며, 노력한 만큼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전제를 깨는 불공정에 대해 가장 분노해 왔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능력주의'는 그렇게 발전해왔고,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정하다'는 명목 아래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한 만큼 결과를 가져가는 사회라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만일 저소득층 대부분이 덜 노력했고, 상류층 대부분이 더 노력해서 나온 결과라면 납득할 수 있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를 한국 상위 10%의 자산점유율은 58.5%, 하위 50%는 5.6%이다. 과연 한국사회의 상위 10%는 하위 50%보다 그만한 노력을 더 해서 더 많은 자산을 취득한 것일까? 능력주의의 전제 조건인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는 실제로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1 사회조사'를 보면 계층 이동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1년 32.2%에서 '19년 22.7%까지 줄었고, 올해 조금 상승하여 25.2%를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지난 10년간 계층 이동 가능성은 하향 추세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층일수록 계층 이동가능성이 55.9%로 크다고 보고, 중층은 30.6%, 하층은 14.9%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깨지고 있다. 능력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미국조차 OECD 국가 중 높은 사회 불평등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잘못된 것인가? 능력주의를 없애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정의로워지는가?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도 없다.

 

 

능력주의

 

능력주의의 본질은 결국 '경쟁'이다. 기회의 공정이 보장된다면, '능력이 좋은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가는 것이 옳다.'라는 전제가 되어 있지만, 이 전제에는 '타인보다'라는 기본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언뜻 보면 경쟁심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식당 줄을 먼저 선 사람이 더 빨리 입장하는 것처럼 매우 당연한 사실이다. 사실 능력주의 자체에는 그렇게 문제가 없다. 노력 이외의 다른 요소(재산, 재능, 우연 등)가 능력주의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이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

 

사실 능력주의의 폐해는 '획일화'로부터 시작된다. 각자의 행복과 성공은 그 기준이 다름에도 소득으로 획일화하고, 학창시절 이를 위한 경쟁요소를 대학교 입시로 두면서 학벌주의 등이 생겨났다. 그 결과 자연스레 책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능력주의에서 승리한 자는 '오만함'을 패배한 자는 '패배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마이클 샌델은 이 부분을 가장 경계하였다.). 대학교 입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

 

능력은 성공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한 가지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능력주의의 폐해

 

결국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획일화로부터 비롯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에서 벗어나면 곧 그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러 부작용이 생긴다. 열등감 유발, 선택권 제한, 불평등, 공정하다는 착각 등이다.

 

1. 소외 계층의 열등감 유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하며, 그 책임 또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있다.

 

2. 개인의 선택권 제한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재능을 강조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거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오히려 선택권을 제한한다. 예를 들면,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축구 재능이 부족하니 더 이상 축구를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것이 그 예시이다.

 

3. 결과의 불평등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큰 보상을 얻고, 패배한 사람은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불평등을 낳을 수 밖에 없다.

 

4. 공정성의 착각

능력주의에 기반한 모든 일은 공정하다는 착각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능력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 함에도 능력으로 포장된 출신 학교, 가족, 집안 배경 등 능력과는 다른 외적 요소에 의해 왜곡된다.

 

 

능력주의의 대안

 

하지만 문제는 능력주의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효율적인 가치관 중 능력주의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능력주의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에 대한 비판도 이 시각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과연 새로운 대안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과연 그가 이야기하는 능력주의에서 벗어나 이루어야 할 공공선은 무엇일까? 자칫하면 결과의 평등으로만 보여질 수 있기에 더더욱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즉,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능력주의의 대안이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니다. 개념적으로 다원적 능력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제시한 이론으로, 개인이 가진 여러 가지 능력 중 특정 능력이 뛰어나다는 개념이다. 가드너는 인간의 두뇌가 8가지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언어, 수리-논리, 시각-공간, 체감-운동, 음악, 대인, 자기 이해, 자연 이해 등이 포함되고, 이 중 하나 이상의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찾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원적 능력주의 또한 능력주의의 기준이 여러가지로 바뀐 것일 뿐 능력주의와 그 본질은 똑같다.

 

또한 다원적 능력주의는 한 국가 차원에서 본다면 원활히 돌아갈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 와 닿는 집단 차원에서는 적용이 어렵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일하고 있는 기업에서 다원적 능력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음악적 재능이 있는 직원도 우대받고,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직원도 우대받을 수 있을까? 즉, 국가 차원에서는 다원적 능력주의가 가능할 지는 몰라도 한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긴 쉽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각 개인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결코 다원적 능력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의 입장에선 다원적 능력주의도 능력주의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에 동감한다. 다만 다원적 능력주의만한 대안은 현재 없다고 생각한다.

 

 

다원적 능력주의 그 너머

 

다원적 능력주의도 결국 그 본질은 능력주의이고, 부작용 또한 있지만 이만한 대안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식당 줄을 먼저 선 사람이 더 빨리 입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기 때문이다(물론 식당 줄을 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식당이 크다면 모두가 줄을 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에서 그건 이뤄지기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도 능력주의의 폐해를 사후에라도 보완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다. 예를 들면, 능력주의에 따른 성과(급여)를 차등하여 세금을 거두고 이를 재분배하여 어느정도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렇듯 능력주의 자체의 부작용을 없앨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해소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양성'과 '존중'이다. 개인의 자율과 희망에 따라 자유롭게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대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분야에서의 기회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서 이를 얻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다양한 기회를 얻기에는 그 비용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교육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의 능력을 찾는 기회를 얻고 사회에서는각 개인이 찾은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능력주의의 폐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설사 이렇게 된다 할 지라도 100%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담보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없는 사회가 어디 있는가, 조금씩 조금씩 문제를 찾아 개선해 나가면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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