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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보았을 때 느낌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영회를 보고 나서 느낀 감정이 묘하게 비슷했다.

 

공통적으로 일종의 '정신적인 역함(?)'을 느꼈다. 재미 없다거나, 작품성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 기생충은 정말로 재밌었고, 인간 실격 또한 정말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다만 던지는 메세지가 나에게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메세지 또한 우리에기는 두려운 메세지였다. 두 작품 모두 던지는 메세지를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었지만, 이 속에서 내가 믿고 싶은 메세지만 따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믿고자 하는 메세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인간 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결국 자살을 했다.

그 점이 이 작품이 던지고 있는 메세지가 너무 무서운 메세지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인간 실격'을 읽고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나 봅니다."
'인간 실격' 중 오바 요조의 생각

 

'인간 실격'은 작가의 정신적 자전 소설로 작가의 삶과 놀랄 정도로 비슷한 부분이 있으며, 인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지독한 자기 혐오와 비관적 인식을 문학적으로 승화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주인공은 '오바 요조'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타인 앞에서 익살스러운 모습, 즉 광대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요조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동시에 혐오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그는 익살꾼을 자처하며 사람들과 함께했다.

 

첫 번째 수기에서는 요조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보여준다.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자라 왔고, 왜 익살꾼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요조의 인간 혐오에 대해 알게 된다.

 

두 번째 수기는 교도소 가기 전까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며  인관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속에서의 요소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광대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던 요조는 그 사실을 눈치 챈 '다케이치'라는 동급생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가까워지려 한다. 친구처럼(?) 지내던 와중 '귀신' 그림을 보고 화가를 꿈꾸게 되지만 원하는 미술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뜻에 의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오랜 기간 함께하게 되는 또 다른 친구(?) '호리키'를 만나게 된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요조는 '술', '여자', '여러 불법' 등을 경험한다. 특히 여러 여자와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그 중 '쓰네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자살을 한다. 하지만 그녀만 죽고, 요조는 살아남게 된다. 이로 인해 재판을 받고, 기소유예를 받는다.

 

세 번째 수기는 재판이 끝난 이후로 요조는 호리키를 찾아가 우연히 만난 '시즈코'라는 여자 집에서 살면서 만화를 그려 돈을 받는다. 시즈코의 딸인 '시게코'에게 "아빠"라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이나마 구원을 받는 느낌을 받지만 진짜 아빠를 가지고 싶다는 시즈코의 말에 그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후 그는 '세간(세상)이란 개인이다.'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그녀를 떠난다. 이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조금은 해방감을 주지만, 여전히 인간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된다. 순수한 여자 '요시코'를 만나 결혼을 하지만 호리키와 술을 마시며 옥상에서 반의어 게임을 할 때, 요시코가 동네 키 작은 장사치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벗어난다. 즉, 인간 실격이 된다.

 

서문부터 이 책은 소름끼치는 느낌을 주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얼굴을 가진 남자. 심지어 '죽은 사람의 얼굴'이라도 이보다 더 살아 있는 느낌을 줄 것이라는 표현은 여러모로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이러한 불편한 감정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그는 요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우선 우리 모두 요조의 모습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각자의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요조라는 인물은 그것이 너무 극단적일 뿐이다. 이러한 요조의 모습은 우리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고, 요조에게 행복한 삶이란 존재하는가?"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다만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단지 질문만으로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신을 닮은 선한 애였어"
'인간 실격' 중 마지막 마담의 말

 

작가의 생각을 알기 위해선 위 구절을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마담'의 말로 작가의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요조라는 캐릭터를 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을 악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작품 속에서도 계속해서 드러난다. 계속해서 세상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악을 두려워 하는 것이고, 많은 여성들이 요조를 탐한 것은 어쩌면 그의 모습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즉, 두려움을 느끼던 요조의 숨겨진 모습에 그들의 가면을 벗고자 하는 욕망이 변질되어 나타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금 책을 보면 책 제목인 '인간 실격', 그리고 책 속에서 나오는 '인간'이라는 단어의 함의는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 요조가 사랑한 여자는 바로 쓰네코와 요시코 단 두명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먼저 쓰네코에 대해 요조가 사랑의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된 것은 호리키가 그녀를 추하다며 거부했을 때이다. 그 때 비로소 요조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쓰네코와 함께 세상(악)을 떠나고자 한다. 다만 쓰네코는 그 결과 구원을 받았지만, 요조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후에 만난 요시코도 쓰네코와는 마찬가지로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쓰네코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쓰네코, 요시코, 요조의 가장 근본적인 공통점은 세상에 대한 무저항이다. 쓰네코는 호리키에게 강제적으로 키스를 당했지만, 추하다며 거부당한다. 그녀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지만 당했고, 버려졌다. 요시코는 순수한 신뢰를 했다. 신뢰를 했기에 그녀는 저항없이 세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신뢰는 철저히 배신을 당했다. 요조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면을 쓴 익살꾼으로 살아갈 뿐이다.

 

요시코의 강간 사건 이후 요조가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구절이 계속해서 나온다.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 "과연 때 묻지 않은 신뢰는 죄의 원천인가?", "신에게 묻는다. 무저항은 죄인가?", 그리고 이후 "인간 ,실격, 이제, 저는, 완전히, 인간이 아닙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은 결국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과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가면을 쓰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는 결국 간접적으로 답을 보여준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을 악으로 규정한다. 인간 실격. 세상으로부터 떠난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그는 정말 세상과 점차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한다. 신을 닮을 인간이었던 그는 세상을 떠나고, 인간 실격이 된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 책이 던져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가면을 쓰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다만, 한가지 찝찝한 사실이 있다면, 작가가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를 하였고(요조와 동일), 결국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다. 생각하기는 싫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절망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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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입사했을 때 선물을 받아 읽게 된 책이다.

 

사실 나는 자기 계발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그래도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다. 왜냐하면 상당히 오랜 연구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보통 다른 자기 계발서는 본인의 경험적인 이야기만을 하거나, 다른 위인들이 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통계적인 근거를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한계점 또한 분명히 말한다. 무엇보다도 여러 분야에서 사례를 연구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공의 기준을 단순히 돈과 명예 만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쉽다. 물론 동일한 기준을 가져야만 분석이 용이하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성공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돈과 명예가 성공인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자신의 성공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길 권하고 싶다. 그 이후에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인 'GRIT'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기를 바란다.

 

 

 

 


'GRIT(그릿)'을 읽고

 

'GRIT(그릿)'이란 원래 있는 단어가 아니라 'Growth(성장)', 'Restilience(회복)', 'Intrinsic Motivation(내재적 동기)', 'Tenacity(끈기)'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새로운 단어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심리학자 앤절라 더크워스가 처음으로 개념화한 용어로,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투지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손꼽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재능'이다. 의미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것에 대해 타고난 자질을 뜻한다. 재능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다. 그렇기에 경솔하게도 타인의 성공을 재능이라고 단지 치부해버리곤 한다. 성공이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재능에 기인한다면, 실패, 열등감 또는 패배감 등은 자신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합리화를 위해 재능이라고 자주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리고는 안도감을 가진다. 그런데 과연 이 생각은 맞는 것일까?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숭배를 조장한다.···왜냐하면 천재를 마법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우리 자신과 비교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니체

책의 저자 또한 재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은 하고 있다. 다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노력'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능력이고, 노력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 잠재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재능이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노력이 필요하다. 기량은 노력이 없이는 늘어나지 않으며,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재능은 단지 기량이 늘어나는 속도에 영향을 줄 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노력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아래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 재능*노력=기량¹

 - 기량*노력=성취

 - 재능*노력*노력=성취

 

그렇다면 그릿은 어떤 것일까? 선천적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기를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 저자는 그릿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릿의 구성요소는 크게 열정과 끈기 두 가지이다. 열정을 얼마나 지속하느냐, 그것이 바로 그릿의 크기가 된다. 열정은 단지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의 의미가 아니다. 본인 인생에 있어 최상위 목표에 얼마나 변함없이 관심을 보이느냐이다. 최상위 목표와 연관된 하위 목표여야만 끈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최상위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은 아니다. 때로는 경로 변경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위 목표일수록 끝까지 끈기를 가지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본인의 최상위 목표를 이루는 지름길이다.

 

다음은 연구 결과인 위인과 일반인을 가르는 4가지 지표이다.

 

 -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삶과 대조되는) 멀리 목표를 두고 일하고, 이후의 삶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며 확고한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정도

 - 단순한 변덕으로 과제를 포기하지 않음. 새로움 때문에 다른 일을 시작하지 않으며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 성향

 - 의지력과 인내심의 정도. 한번 결정한 사항을 조용히 밀고 나가는 결단력

 - 장애물 앞에서 과업을 포기하지 않는 성향, 끈기, 집요함, 완강함

 

그릿에는 어느 정도에 유전적인 요인이 있을 뿐, 충분히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는 요소라고 말한다. 그릿을 기르기 위한 4가지 방법은 우선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10여 년 간 관심에 대한 연구 결과 개인적인 관심과 일이 일치할 때에 만족감이 높았다. 그리고 일이 흥미로운 경우 높은 성과를 올렸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관심과 열정이 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의외로 관심 가는 일은 운명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내면의 성찰이 아닌 외부의 활동 속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유지될 수 있다. 노력 없이는 관심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질적으로 다른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릿은 양뿐만 아니라 질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에릭슨의 한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은 보통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0년 간 약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평균일 뿐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연습'이다. 자신이 부족한 점을 찾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연습을 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식적인 연습을 위해서는 첫째, 과학적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명료하게 진술된 도전적 목표, 완벽한 집중과 노력, 즉각적이고 유용한 피드백, 반성과 개선을 동반한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이를 습관화하면, 비로소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의식적인 연습을 바로 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로 그릿의 성장을 위해서는 더 높은 목적의식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더 높은 목적 의식이란 바로 타인에게 기여하겠다는 의식이다. 심리학자 벤저민 블룸에 따르면, 자기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모두 3단계를 거치며 발전했다. 처음에는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시작하고, 이후 이를 연습하며 발전시키는 법을 배웠고, 마지막에는 타인 중심의 목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릿이 높을수록 타인 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단, 타인 중심적인 삶을 추구할 수록 그릿이 높은 것인지, 그 인과 관계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데이비드 예거에 따르면, 목적의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하는 일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에이미 브제스니예프스키에 의하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주어 자신의 핵심 가치와 연관성을 증대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빌데이먼은 목적이 확실한 롤 모델을 찾아야 목적 의식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릿을 위해서 희망을 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단 이 희망의 의미는 단순히 내일이 좋을 것이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노력을 하면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이는 본인이 성장, 즉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스티브 마이어의 실험에 따르면 죽지 않을 만큼의 시련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에 더 강한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다고 한다. 그리고 낙관적인 자기 대화를 해야 한다. 인지행동치료의 한 방법으로 낙관적인 사고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방법도 있다.

"죽을 만큼의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릿이 강한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며 끝이 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릿만이 성공의 요인이 아님을 말하며, 어느 정도 한계점을 인정한다. 이 책은 일반적인 자기계발서 책과는 다르게, 상당히 오랜 연구 결과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다른 자기계발서에 비해 상당히 신뢰가 가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성공의 중요한 요인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먼저 성공의 정의에 대해 내리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대게는 성공을 남들보다 좀 더 높은 위치, 돈, 명예 등으로 해석하고 말한다. 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성공의 정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타인과의 비교를 담고 있다. 타인의 성공을 판단할 때도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에를 들자면, 진짜 성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체감할 수 있다. 

돈을 성공의 기준이라고 가정해보자. 두 사람이 있다. A와 B. A는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에 높은 위치에 올라 돈을 축적할 수 있었다. 반면 B는 재벌 집안으로 처음부터 많은 돈을 보유하였다. 그리고 현재에도 처음보다는 아니지만,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A보다 돈이 많다. 과연 누가 더 성공했는가? 내 생각에는 A이다. A는 돈을 더 벌었기 때문이다. 

 

즉, 성공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내가 얼마나 더 목표에 가까워 졌는가'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성공 레일을 가지고 있다. 이 레일은 서로 교차하지도 않고, 시작도 다르며 끝도 다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의 레일에서 본인이 얼마나 전진했는가이다. 다른 사람의 레일에 신경쓰고, 자신의 레일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진짜 성공에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레일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자신의 레일 위에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의 말에 굉장히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조금이지만 꾸준히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계속 발전해 나가는 것이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부분이다.

 

그릿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단순히 "끈기가 최고다"라는 의미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는지를 깊게 고찰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과연 성공은 무엇인가도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늦었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시간은 상당히 많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씩 발전하면 성공한 자신을 볼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잘못 잡았거나, 노력을 안하고 있을 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에 대한 명언이 있다. 모두가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명언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자승자강,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
노자 '도덕경' 중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²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¹책에서는 '기술'이라 표현되어 있으나, '기량'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아 '기량'으로 표기하였음

 

²위버멘쉬는 일종의 초인과 같은 개념으로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이며,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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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매우 무서울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철학에 기반에 둔 책이다. 이 철학은 프로이드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철학으로, 무의식을 강조한 프로이드와 달리 아들러는 의식의 힘과 자유의지를 상당히 중히 여겼다. 이 책이 무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프로이드는 과거 트라우마 등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현재의 나의 책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책임이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러의 철학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전혀 없다. 오직 현재 개인의 책임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을 지은 이유는 단순하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타자와 자신을 분리) 살아가는 용기에는 분명 미움받을 수 있는 상황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인정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사는 길은 분명 어렵지만, 책에서는 용기를 내라고 말한다.

단지 호기심에 읽는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 등은 매우 재밌고 흥미롭다. 다만 그저 읽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없는 책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타인의 인정 욕구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지라도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그 정도의 용기는 발휘하길 바란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심리학과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교육학, 범죄학, 문예비평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전 분야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 정신 분석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프로이드 학파는 원인론을 주된 이론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 이는 모든 신체 현상이 인과 법칙에 의해 일어나듯이 정신적인 현상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원인으로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무의식이 거대한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빙산의 일각처럼 물 밑에 잠겨 있는 거대한 무의식이 사실상 사람의 행동을 좌지우지한다는 주장이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입증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하는 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또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사실상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반향을 일으켰다(이외에도 여러 의견이 있다.). 즉, 프로이드 입장에서는 사람은 쉽게 변할 수 없으며, 사실상 과거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사람의 인생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프로이드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이다.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 오스트리아), 초기에는 프로이드 융과 함께 활동을 하였으나, 이후 프로이드와 학설 상의 이견을 보이며 개인 심리학회를 창설하게 된다. 성 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드에 반대하였으며,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열등감에 대한 보상 욕구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위대해진 것이고, 색약을 가진 사람이 대화가가 된다는 것이다. 열등감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인간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무의식을 강조하는 프로이드와는 달리 의식이 지닌 힘과 자유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아들러의 철학은 책에서도 목적론의 형태로 잘 나타나고 있다.

우선 아들러의 세계관은 '개인심리학'에 기초한 것으로 각자가 개인의 시선 속에서 형성된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아간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서로가 느끼는 바가 다르듯, 주관에 따라 사는 세계는 단순하게 또는 복잡하게 바뀐다. 이는 단순히 착각이 아닌, 실제로 본인이 느끼는 현실이므로 모든 주관적인 세계는 사실이고, 곧 현재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과거에 불행했던 사람도 당장 생각의 변화를 통해 행복한 세계에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아들러의 세계관 관점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은 모두 단순히 개인적인 생각의 산물일까? 아들러는 조금 더 세밀하게 이야기한다.

'목적론'으로 프로이드의 원인론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지 않고, 목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한 예를 들자면, 과거 불행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집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 밖에 나가지 않기 위해서 불행한 가정환경이라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가정환경이 불행한 모든 사람이 집 밖으로 안 나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위 2가지 개념을 기반으로 모든 고민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 열등감을 주된 문제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들러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인생의 과제'를 극복해 나갈 것을 주장한다.
인생의 과제는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 총 3가지로 나뉘는데 일의 과제란 일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일은 혼자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이루질 수밖에 없고 이 과정 속에서 인간관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다음으로 교우의 과제란 일을 벗어난 관계로 더 넓은 의미의 친구 관계를 말한다. 특히 이 관계는 관계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리와 깊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과제는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연애 관계와 가족 관계이다. 연애 관계는 말 그대로 서로가 행복해하면 인정해주는, 전혀 상대방을 구속하지 않는 관계이다. 반면 가족 관계는 헤어지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더 복잡한 관계라고 말하며, 피하지 않는 것이 가장 우선시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의 과제와 가장 관련이 깊은 욕구가 바로 '인정욕구'이다. 아들러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개인이 자유로워지고, 인생의 과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미움받을 용기'가 나온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미움을 받더라도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이기적으로 살라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아들러는 이에 대해 '과제의 분리' 개념을 말한다.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는 것으로, 어떠한 과제가 주어졌을 때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말한다. 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과제에 대한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면 된다. 구분을 한 뒤, 타인의 과제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방임주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존중으로 언제든 도울 의지가 있다고 보여주면서 과제를 스스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한다.

아들러의 심리학이 단지 개인적인 부분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점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개념이 바로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다. 이를 통해 개인은 자신의 가치를 충족시키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얻는 것이 바로 '공동체 감각'이다.
우선 자기수용이란 자기긍정과는 다른 개념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타자신뢰란 담보를 통해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타자공헌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개념이 아닌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개념으로 자신의 가치 실현이 곧 타자공헌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지면 소속감을 느끼게 되며, 공동체 감각이 형성된다.

나는 아들러의 철학에 대해 전체적으로 깊이 공감한다. 우선 실제로 누구나 같은 일을 경험해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례를 영화화한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 가드너도 어려운 환경과 차별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고 마지막에는 본인의 목표를 이룬다. 그 다음으로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프로이드의 철학과는 달리 아들러의 철학은 개인의 의지를 중요시 여긴다. 이전에 그릿(GRIT)이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모두에게 각자의 성공 레일이 있으며, 각자의 레일 위에서 발전하는 것이 곧 바로 성공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인정 욕구에 휘둘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레일 위에서 나아가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개인의 가치 실현과 타자공헌이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진정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에서 나온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러의 철학 중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개인과 타자를 상당히 분리적으로 보고 있는 점을 언급하며 동시에 타자공헌과 공동체 감각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나는 과연 이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자에게 공헌한다는 것은 보편적 생각에 비춰 봤을 때, 본질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러는 타자와의 분리를 강조하며, 칭찬, 비판 등 적극적인 개입의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단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신호만 보내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과연 두부 자르듯 분명한 구분이 가능할까? 만일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그 개인의 책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과제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삶은 혼자 살아가는 삶이 아닌 많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이루어져 나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자공헌 개념을 나는 굉장히 공감하지만, 두부 자르듯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여러 사람과 동시에 연관된 과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러의 과제의 분리, 타인과의 분리는 대다수의 인간관계와 상황에서 옳다고 보여진다. 흔히 이런 격언도 있다. "10명 중 7명은 나에게 무관심하고, 2명은 날 싫어하며, 1명은 날 좋아한다." 아들러의 과제의 분리는 무관심한 7명에게는 유용하지만, 나머지 3명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특히 본인을 좋아하는 1명의 사람과 완전한 분리는 어렵다. 인정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인정 욕구와 별개의 문제로 말 그대로 타인을 돕는다는 가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나의 삶은 곧 개인의 삶이지만 친구 역시 삶 속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러와는 조금 생각이 다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격언에서 나오는 나를 좋아하는 1명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미움받을 용기는 나머지 9명에게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당연하게도 이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본인을 좋아해주는 1명에게 실망을 주면서까지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행복은 어느순간 뒷전이 되어버리곤 한다.
인간 관계라는 것은 절대로 완벽하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렇기에 본인이 원하는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누군가와 관계가 안 좋거나, 친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저 그런 사람과는 서로 관심을 끊은 채 살아가면 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삶이 비정상적인 삶이고, 있을 수 없는 삶이다.

또한 프로이드의 원인론에 대해서는 나는 아들러와 동일한 입장이다. 종종 발생한 결과의 원인을 외부적인 환경에 귀인시키며, 합리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외부 사람의 성공은 외부적인 환경을 원인으로 보고, 실패는 그 사람이 원인이라고 본다.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성과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실패는 외부적인 환경으로 탓을 돌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프로이드 원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의 책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칫 합리화에 빠지는 삶을 당연하게 만들고, 개인 노력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된다. 물론 프로이드의 원인론은 여러 현상을 설명해준다. 수학 공식과 같이 100%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범행의 본질적 원인, 개인 성격의 원인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 가능한 경향성을 보여준다.
경향성을 띤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경향성을 띤다는 것은 곧 경향성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향성을 벗어난 사람들은 프로이드의 원인론 관점에서는 'Outlier'이다(물론 프로이드는 또 다른 원인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프로이드의 원인론에 갇혀 살지 않고, 아들러의 목적론과 같이 개인의 힘과 능력, 의지를 통해 벗어난 것이다. 결국 프로이드 원인론의 학문적 의의는 인정하지만, 이는 곧 수학적인 공식이 아닐 뿐더러 우리 개개인에게는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조금 더 유익하다는 점에서 나는 차이를 둔다.

미움받을 용기는 이러한 메세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프로이드의 원인론에서 벗어나 Outlier가 되는 것. 목표를 삼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인간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과거의 사건에 연연하여 현재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의 삶을 위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 책은 단지 한 사람의 철학을 볼 수 있는 내용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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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中

 

비어 있는 방에 침팬지 다섯 마리를 들여보낸다. 방 한복판에는 사다리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에는 바나나가 놓여 있다.

 

한 침팬지가 바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먹기 위해 사다리로 기어오른다. 하지만 침팬지가 바나나에 다가가자마자 천장에서 찬물이 분출하여 침팬지를 떨어뜨린다. 다른 침팬지들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바나나를 잡아 보려고 한다. 모두가 찬물을 뒤집어쓰고 결국 바나나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그다음에는 천장에서 찬물이 분출하지 않게 해 놓고 물에 젖은 침팬지 한 마리를 다른 침팬지로 대체한다. 새 침팬지가 들어오자마자 원래부터 있던 침팬지들은 사다리로 올라가는 것을 말린다. 저희 나름대로 새 침팬지가 찬물을 뒤집어쓰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새 침팬지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다른 침팬지들이 자기가 바나나를 먹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완력을 쓰기로 하고 자기를 제지하려는 침팬지들과 싸운다. 하지만 한 마리 대 네 마리의 싸움이라서 새 침팬지는 뭇매를 맞고 만다.

 

다시 물에 젖은 침팬지  한 마리를 새 침팬지로 대체한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앞서 교체되어 들어온 침팬지가 덤벼들어 그를 때린다. 그게 새로 들어온 자를 맞이하는 방식이라고 저 나름으로 이해한 것이다. 새 침팬지는 사다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겨를도 없었다. 말하자면 구타 행위는 이미 바나나와 무관해진 셈이다.

 

물을 뒤집어 쓴 나머지 세 침팬지도 차례로 나가고 대신 물에 젖지 않은 침팬지들이 들어온다. 그때마다 새로 들어온 침팬지는 들어오자마자 매질을 당한다.

 

신고식은 갈수록 난폭해진다. 급기야는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새로 들어온 침팬지에게 뭇매를 놓는다.

 

여전히 바나나는 사다리 꼭대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다섯 마리 침팬지는 바나나를 잡으려다 물을 뒤집어쓴 적도 없으면서 그것에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뭇매를 맞을 새 침팬지가 어서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문을 살피는 것이다.

 

이 실험은 한 기업에서 나타나는 집단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이 이야기가 나는 기업의 조직문화를 가장 잘 나타낸 일화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모두를 위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느 순간에는 장애물로 변하게 되고 이제는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채 옳다고 믿으며 행동하는 것이다. 조직문화의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이다. 한 때는 옳았던 것일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기업의 성과를 막는 큰 장애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인턴 근무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 중 회사 야근 문화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다. 자기보다 위에 사람이 퇴근을 하지 못하면, 끝까지 남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매해 이 문화는 불합리한 문화라고 이야기가 나오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를 이 이야기를 해준 분의 말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원래는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데, 이제 생각해보니까 그게 맞아. 팀원을 두고 자기 일 없다고 가는걸 누가 좋아하겠어"

 

변한 것이다.

 

자기 또한 그 안에서 함께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문화에 흡수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이 야근문화에 모두들 익숙해져 있다. 흔히들 정시에 퇴근하는 것을 "칼퇴근하네", "오늘은 일찍 가네" 등 근무시간이 끝난 직후에 퇴근하면 일찍 퇴근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러한 말을 종종 사용했다. 자기도 모른 채 문화에 흡수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나중에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보상심리든 뭐든 간에 이미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감정에 의존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가 한 때는 힘을 발휘했었다. 다 같이 의기투합하여 밤을 새며 야근하는 문화는 분명 우리나라를 성장시키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이미 "요즘 세대는 옛날 같이 하는 맛이 없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오히려 이러한 문화가 우리를 붙잡고 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

-아인슈타인-

 

그렇다면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답은 없다. 아니,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침팬지의 이야기에서 만일 누군가가 모든 침팬지를 제압하고 올라가 바나나를 먹었다면 어떻게 될까? 순식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CEO, HR부서, 그리고 모든 부서가 협력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조직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게 맞더라"는 바보같은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한다. 그 옛 기억에 취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시장환경에 맞게 빠르게 조직문화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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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관점으로 차별이라는 용어가 처음 대두된 것은 1957년 미국 경제학자 게리 베커(Gary Baker, 1930~2014)에 의해 '차별의 경제학'에서 '선호에 의한 차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이는 인종, 종교, 성별 등에 따라 편견을 가져 피하거나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당시 일종의 심리학 또는 사회학 개념으로 경제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경제학의 영역에서도 차별 개념이 관심을 받게 되었고, 게리 베커의 '차별의 경제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게리 베커는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다.

 

차별이 경제학에서 하나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잡으며 등장하게 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통계적 차별(Statistical Discrimination)'이다. 1970년대 제시된 개념으로 197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 1921~)와 2006년 노밸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Phelps, 1933~)가 제시하였다,

 

'통계적 차별'이란 개인이 속한 집단의 평균에 의해 개개인을 판단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A 집단(상대적으로 우수한 집단)과 B 집단(상대적으로 열등한 집단)을 비교할 때, A에 속한 개인 a의 경우 A 집단의 평균으로 평가받고, B에 속한 개인 b의 경우 B 집단의 평균으로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b가 A 집단의 평균보다 우수한 능력을 보일 수 있으나 통계적 차별에 의해 B 집단의 평균으로 저평가 받는 것이다. 즉, 만일 b가 A 집단의 평균보다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b는 통계적 차별이라는 명백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통계적 차별이 틀리다라는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의 근원적 한계인 인지적 한계에 의해 개개인에 대해 모를 경우 속한 집단의 일반적인 속성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계적 차별은 여러 곳에서 당연하게 시행되고 있고, 실제로 때로는 유용하기도 하다(통계적 차별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면 기업이 채용을 할 때, 여러 우대사항(명문대 우대 등) 등이 그러하다. 또한 실생활에서 밤길을 다니며 뒤따라오는 사람이 남성일 경우 위협을 느끼는 반면, 여성일 경우 안심하는 것도 하나의 예이다. 이렇듯 통계적 차별은 필수불가결하게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처음 이 개념을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남성일 교수님의 노동경제학 수업에서이다. 수업에서 이 개념을 들으며, 통계적 차별이 HR 분야 중 특히나 채용 분야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채용 분야에서 통계적 차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통계적 차별은 정말 불합리한 차별인가? 채용 과정에서 수 많은 지원자들을 각각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지원자들이 속한 집단(대학교, 성별, 지역, 종교, 자격증, 기타 스펙 등)의 속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 평가 방식이 과연 정말로 불합리한 차별인가?"

 

이에 대해 우선 생각을 하며 결론을 내린 생각은 바로 본원적 속성(바꿀 수 없는) 성별, 지역 등에 의한 차별의 경우 명백한 불합리한 차별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교, 기타 스펙 등의 경우 불합리한 차별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평가'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개개인에 대해 모두 평가할 수 없으므로 통계적 차별은 채용 과정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작용한다. 

 

사실 통계적 차별은 어디에서나 쓰인다. 예를 들면 인적성검사는 100% 채용자의 역량을 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검사의 결과에 의해 지원자들의 합격, 불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인적성 검사 100점인 지원자의 역량과 80점인 지원자의 역량은 사실 누가 더 높은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00점인 지원자가 더 높을 것이라는 일종의 통계적 차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계적 차별이 유용하다고 해서 블라인드 채용 방식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블라인드 채용은 통계적 차별을 배제하고 개개인의 역량을 평가하려는 채용 방식으로 어떻게 보면, 채용 목적에 가장 부합한 방식이다. 다만 이 방식으로 모두를 채용하기에는 비용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일부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통계적 차별이 실제 차이로 고착화되는 문제이다.

 

"채용 후 관찰 가능한 A 집단과 B 집단의 능력의 차이가 과연 실제 능력의 차이인가? 즉 구조적인 문제에 의해 A 집단과 B 집단의 차이가 고착화된 것일 수 있다. 각 집단의 특성이 과연 실제 차이에 기반한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즉, 통계적 차별에 의한 결과가 다시금 통계적 차별을 더욱 공고히 해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명문대학교 A를 다닌 a와 비명문대학교 B를 다닌 b가 동기로 입사하여 처음 프로젝트를 맡길 때, 통계적 차별에 의해 a에게 기회가 간다. 교육, 평가 등에서도 이러한 차별이 적용되면서, a에게 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결국 통계적 차별은 실제 a와 b의 능력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고, 다시금 통계적 차별의 정당성은 공고해진다.

 

이 문제는 가장 접근하고, 분석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파악하기 어려울 뿐더러, 실제로 불가피한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조적 문제가 과연 비효율적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많은 비용이 들겠지만, a와 b에게 모두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할 지 아니면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 효율적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제 지원자의 능력의 차이가 곧 성과의 차이로 드러나는가의 문제이다.

 

"실제로 A 집단과 B 집단의 능력의 차이가 있을 지라도 다 함께 일하는 기업의 현장에서 이러한 능력의 차이가 그대로 성과로 드러날 것인가? 과연 개인의 능력의 합이 곧 조직의 성과 또는 능력이라는 등호가 성립될 수 있는가?" 

 

a와 b의 능력 차이가 실제로 있을지라도 이 차이가 과연 조직의 성과에 그대로 드러날 지는 의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조직의 모든 활동은 개인이 아닌 협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통계적 차별의 대부분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때 일어나기 때문에 협동 능력에 대한 평가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단지 협동 능력을 떠나 각 개개인의 능력 간 협업 시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동일한 능력을 가진 2명의 협업보다 다른 능력을 가진 자들의 협업이 더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에서도 이를 알고, 다양성 채용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는 곧 채용 과정에서 협업 능력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떠한 특성의 능력을 가진 지원자가 기존 구성원과 협업하며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는 지 HR 담당자들이 지속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사실 이는 이전에는 어려웠겠지만, 이제는 빅데이터가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문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어느정도 통계적 차별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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