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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국가 차원이든, 회사 차원이든, 소규모 집단 차원이든 어디서든 알게 모르게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런 말을 우리는 종종 한다.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의무를 다 해라", "의무도 지키지 않는 것들에게는 권리는 없다." 그런데 과연 의무를 지켜야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의무를 지켜야만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무엇이 대체 먼저인 걸까?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 의무를 떠나서 태어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부여 받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존중할 의무 또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는, 가장 먼저 권리가 생기고 의무가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서로 함께 묶어 한 가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생각일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되고 양립해야 의미가 생기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사회에서는 권리보다는 의무가 선행되는 것으로 보는 인식이 더 많기는 하다. 왜냐하면 권리를 누린 뒤에 의무를 다하는 것과 의무를 다한 뒤에 권리를 누리는 것 중 후자가 더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정의 개념에 부합하기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먼저라고 해서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개 모두 항상 있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리가 없다고 해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해서 권리를 빼앗으려는 것 등 어느 하나가 없다고 다른 한쪽도 없애려는 생각은 바보 같은 짓이다. 권리와 의무 둘 다 없어서는 안 되고 꼭 필요하다. 다른 하나가 만일 없다면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 이는 곧 사회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훌륭하게 이행된 의무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리는 가질 가치가 없다."
마하트마 간디

 

집단 속에서 구성원으로 속해 있다면,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권리를 보장받는 여부를 떠나서 우선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만 권리를 요구할 자격과 명분이 생긴다. 왜일까? 권리를 받기 위해서는 '권리'라고 명명된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줄 수 있는 어떠한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권리는 앞에 올 수 없다. 의무가 먼저 올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의무를 통해 권리를 주는 주체에게 무언가 생겨야만 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국가에 납세의 의무(세금 등)를 다함으로써 보호받을 권리(치안) 등을 보장받는다. 권리 먼저 주기에는 치안에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 그리고 이 비용은 의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의무가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의무를 성실하게 하더라도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누구의 불찰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100%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마하트마 간디

 

그래서 그런지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무를 다하지 않고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권리가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흔히 권리와 자신의 이익 추구와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주장하고 이렇게 이야기 하곤 한다. "권리를 누릴 수 없으니, 의무를 지킬 책임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의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의무가 없는 권리는 이기주의이다.

 

다소 횡설수설하며 말하기는 했지만 결론은 두 개념은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기에는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두 개념은 동일시 되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안 되고, 중요도의 비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순서를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굳이 뭐가 먼저인지는 따질 필요는 없다. 그저 이 사실만 기억하면 좋겠다. 권리와 의무 모두 우리 모두가 지키며 동시에 누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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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읽은 베스트셀러 책 "생각하는 인문학"이다.

 

개인적으로 읽기 전에는 포용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베스트셀러이기도 하고, 단순히 책 표지에서 주는 느낌이 그랬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편안하게 읽고, 인문학이란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지를 쉽게 풀어 놓은 책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전혀 반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정말일까?", "오, 내용 괜찮은데" 등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고, 독후감을 쓰며 내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그 위화감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나는 이 책의 저자를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책 장사꾼'으로 보고 있다.

 

책을 팔기 위해 자료를 짜깁기 하여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고, 과장을 하여 본인의 책을 신격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사이비 종교가 하는 방식과 비슷해 보인다. 실제로 논리적 오류도 존재한다. 물론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인문학 책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의(?)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거짓된 말로 일으킨 것이므로 그저 금방 사라질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책에 언급한대로 그 능력(과학적 지식에도 정통한 것, 인문학 책을 통째로 외우는 것 등)을 보여준다면 인정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이라는 만병통치약은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나 또한 인문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인문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만병통치약은 그 어디에도 없을 뿐더러 설사 저자가 말한대로 하면 만병통치약일지라도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없다(어떤 분야든 저자가 말하는 수준대로 하면 사실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도 중요하지만 나는 사람들 각자가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그 철학에 맞게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리고 다양한 철학이 조화를 이룰 때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 단지 인문학을 많이 공부한다고 해서,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따라한다고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철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철학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큰 위인이라 할 수 있다.

 

내 생각과는 반대하는 분들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독후감 전문]

 

"생각하는 인문학"을 읽고

 

'생각'이란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등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의식활동과 그 내용 모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구까지 하고 있다. 이 책도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5000년의 역사를 만든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에 대해 소개하는 책이다. 인문학의 본질은 '생각'으로 생각하는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 또한 천재의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이에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우리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생각을 당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며, 그 원인을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서 찾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하에서는 생각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교육 시스템은 일본에 의해 시행된 우민화 교육이며, 국민들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저급한 노동력만을 양성한다고 말한다.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들 또한 국민들에게 철학 교육을 금지하였고, 군사독재 시대에서는 철학을 말살하다시피 하여 결국에는 교육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는 우리는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생각 시스템을 모두 부수고 인문학적 사고 방식으로 재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사색공부법 10가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위대해지려고 각오한 사람만이 위인이 될 수 있다. 입지하라"

사색의 목적을 가지라는 의미로 목적없이 사색하는 것은 헛된 일이기 때문에 항상 사색을 할 때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하라는 것이다. 율곡의 입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며, 혁구습(8가지 나쁜 옛 습관을 버리는 것), 구용(9가지 바른 몸가짐)과 구사(9가지 사색)의 자세로 입지를 하라고 이야기 한다.

 

"둘째,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거경궁리하라"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이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황홀한 사색법이 바로 거경궁리이며,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사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정제엄숙, 주일무적(하나에 마음을 쏟는 것), 상성성(마음이 항상 깨어 있는 것), 기심수렴불용일물(마음을 온전히 하는 것) 등을 실천하라고 이야기 한다.

 

"셋째, 전쟁같은 독서와 사색, 격물치지 하라"

격물치지란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인문고전에 나오는 글자의 이치를 파고 들고, 역사고전을 통해 흥망성쇠의 이치를 파고 들며 실제로 우주와 사람과 만물의 이치를 파고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넷째, 소크라테스처럼, 육체의 한계를 초월해 사색하라"

사색을 최우선으로 두고, 육체의 한계조차 초월할 뿐 아니라 시선이나 평가 등에도 신경쓰지 말고 오직 사색만을 할 것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끝까지 사색하여 해답을 얻으라는 것이다."

 

"다섯째, 천재들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언어, 원어로 읽어라"

제 아무리 뛰어난 번역자라 할 지라도 원전에 담긴 인문고전 저자의 영혼까지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원어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어로 읽으면서 인문고전 저자의 관점에서 사색하는 것을 권유한다.

 

"여섯째, 인문고전의 반열에 오른 해설서로 사색하라."

인문고전의 반열에 오른 해설서는 천재들이 인문고전을 읽고 남긴 사색노트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사색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색과 비교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일곱 번째, 순정을 바치듯 한 권의 인문고전에 평생 몰두하라"

한 권의 인문고전을 평생 연구함으로써 그 인문고전의 철학이 아닌 철학하는 법을 배우라고 이야기 한다.

 

"여덞 번째, 인문고전의 목차로 사색지도를 그려라"

책을 읽기 전에 책의 목차를 적고 사색을 한 뒤, 사색한 내용을 글로 정리한다. 이후 책을 통독하고 다시 2, 3회 정독 또는 필사까지 한 뒤에 책의 내용을 정리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색한 것과 책의 내용을 비교한 뒤 이를 글로 정리하고 천재처럼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해보는 것이다.

 

"아홉 번째, 연표를 통해 균형 잡힌 시각을 길러라"

역사를 공부할 때 생각이 깊어지고 지식이 향상되며, 학문이 진보하므로 연표를 중심으로 역사고전을 읽고 전쟁, 반란, 혁명 등과 같은 사건에서는 잠시 멈추고 결과를 예측하고 틀렸다면 그 이유를 사색하고 맞으면 계속 읽는 것이다. 역사 가운데 있다고 상상하며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을 파악하고 후세에 끼친 영향엥 대해 사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고민한다.

 

"마지막 그랜드투어 하라."

인문고전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인문학적 지식과 지혜를 쌓는 그랜드투어를 하라는 것이다. 인문여행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인문학적 사고를 가지고 이후에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서번트 투어를 통해 영혼의 성장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된 사색공부법 10가지에 대해 소개하지만, 이 외에도 더 자세한 내용은 책에 담겨져 있다. 인문학 사색을 통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왔고 어떠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사색을 해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문학적 책 뿐 아니라 과학적 책도 소개하므로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는 것도 편하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정말 최악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자료를 짜깁기해서 만든 듯한 책으로 자신만의 철학은 전혀 없이 이 그저 여러 책의 내용을 꺼내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프레임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하자면, 우선 공포를 조장한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을 비난하며 우리나라 교육을 받은 우리는 이미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에는 후진국으로 전락해 중국, 베트남 등지로 노동을 하러 가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청공장, 후진국, 재앙 등의 단어로 더욱 강렬하게 말한다.

 

그 다음으로 희망을 주입한다. 이해할 수 없는 논리와 추측성 문장으로 인문학을 통해서 쓰레기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사색을 함으로써 인간의 두뇌를 활용하고, 나아가 타인에 비해 두뇌 속 생각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경지에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인문학적 사고를 신격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불가능한 방법을 이야기한다. 원어로 인문학 서적을 읽어야 하고, 좋은 인문학은 암기까지 하고 되도록 필사를 해야 한다. 클래식, 명화, 위대한 건축물 등을 즐기고 항상 사색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사색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문학 서적 뿐 아니라 경제학, 과학 서적 등 모든 서적에 대해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방법을 통해 삶이 변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이야기 하며 끝을 맺는 구조이다. 자신은 사색하는 법을 통해 생각하는 사고가 넓어짐으로써 한두 달이 지날지라도 90% 이상 기억하는 능력 일명 '포토그래피 메모리'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프레임을 정리하자면, 공포감을 조성한 뒤 희망을 주입하고 이에 불가능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이야기 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장담컨대, 절대로 저자 본인에게 저러한 능력은 없을 뿐더러 실제로 책에서 이야기한 방식대로 인문학 공부를 한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저자가 이러한 비판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왜 아직까지도 그 능력을 증명하지 못할까? 의문일 뿐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게 본인 책의 내용을 입증하는데 더 도움이 될텐데 말이다.

 

저자의 논리와 사고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성공하면 인문학적 사고를 한 것이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잘못된 인문학적 사고를 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간단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위인들 중 인문학 공부를 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인문학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 중 실패한 위인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단지 옳은 사색법과 잘못된 사색법이라는 결과론적인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성공한 사람 모두가 인문학을 했다고 인문학이 성공의 주된 요인이라는 논리는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실제로 성공했다고 알려진 모든 위인이 인문학을 했다는 사실도 없을 뿐 더러 그 사실이 주된 요인이 될 수는 없다.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무실 또는 집 안에 인문학의 흔적이 있으므로 인문학을 통해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를 성공의 주된 요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저자가 책의 좋은 글귀란 글귀는 짜깁기 해서 책을 쓰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이를 기반으로 허황된 의식에 빠져 인문학을 신앙화 하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진리나 신앙이 아닌 하나의 학문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절대로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팔기 위해서 이러한 거짓된 말로 선동하는 것은 정말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인문학 교육은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

 

일단 교육 시스템부터 이야기 하자면, 우리나라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점에서는 나도 어느정도 공감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주입식 교육이 쓰레기 교육이라는 사고는 상당히 위험하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선택사항이 좁다는 측면이다. 어느 교육이 옳고 잘못되었다는 방식을 누가 선정할 수 있을까? 나는 모두에게 선택을 통해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입식 교육은 단지 교육의 방식일 뿐이다. 자신에게 교육 방식을 선택하는 환경이 올바른 교육이다. 선택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제공해야만 자연스럽게 선택되지 못한 교육 방식은 도태될 것이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이유는, 누군가는 인문학을 싫어하고 누군가는 주입식 교육을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하다 보면 인문학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그런 오만함은 버려야 한다. 사람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행복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에 각각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그래서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기도 하고, 그 속에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한다. 이에 교육 또한 각자의 다양성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내가 추구하는 교육의 이상향은 바로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그러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 책을 읽지 않는 삶은 행복하지 않은 삶일까?

 

나는 각자가 인문학을 모른다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선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으로 포괄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사람들 각자 자신만의 생각, 철학 그리고 예술 등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이란 이렇듯 매우 넓은 영역이다. 어떻게 딱 규정할 수 있는 학문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인문학을 실천해 나가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별개로 인문학 책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만의 철학을 가꾸고 실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행복에 직접적인 요소는 아니다. 즉, 무조건 인문학 책을 읽고 사고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인문학 책은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철학을 표현한 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이고,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철학이란 일종의 가치관과 비슷한 개념으로 어떠한 상황이나 선택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논리적이고 규칙적인 행동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행복한 삶이란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이를 행할 수 있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본다. 어떠한 철학을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공자의 철학이 옳은가? 아니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옳은가? 그 누가 와도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답이 없기도 하다. 단순히 철학이든, 깊은 철학이든 넓은 철학이든 무엇이 더 좋고 옳은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당장 누군가가 흔히 말하는 소크라테스, 공자의 삶은 산다고 해서 과연 행복할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 그 철학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행복한 삶이지 그 이상 그 무엇도 아니다. 누군가의 철학을 존경하며 그러한 사고를 하려는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철학이 항상 절대적일 수는 없을 뿐더러 그래서도 안된다.

 

자신만의 철학을 세워 나가면서 이를 실천하고, 서로의 철학을 존중하며 배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문학 책은 이를 도와주는 좋은 도구일 뿐 그 이상 그 무엇도 아니다. 인문학 책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얻으려는 것은 좋지만, 마치 절대적인 것인 마냥 신앙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허황된 책이 아닌 정말로 좋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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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나온 브루스 웨인(배트맨)과 그의 어릴적 소꼽친구 레이첼의 대화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말하고자 하는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물론 레이첼은 이 당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오해가 섞여 있다.).

 

입시를 경험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면접이었다. 논술을 통과하고 보는 면접이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합격했다는 큰 자만(?)에 빠져서 면접을 보았다. 그때 내 기억으로 면접 문제를 요약하자면, "동기가 좋은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와 동기는 불순하지만 결과가 좋은 경우" 두 가지를 비교하는 문제였다. 당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고, 단지 철학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지원했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 여러 사회 이슈들을 보면서 드는 사색이 이 질문과 어느정도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기와 결과에 초점을 맞춘 문제였기 때문에 관점은 다르다. 하지만 "과연 '사람에 대한 정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요소는 어떤 요소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옳은 것일까?

 

우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본질, 생각, 그 사람의 신념, 환경 등 여러가지 요소를 놓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행동'이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한 소아성애자 사람을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아동에 대한 성적 관심은 많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확실하게 아동에 대해서 성적 흥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육을 받으며,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억제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며 자신을 향해 웃는 아이, 자신에게 포옹을 해주는 아이, 뽀뽀를 해주는 아이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며 만족감을 얻어 왔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아동의 복지를 크게 개선시키고 수 많은 아이들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성인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고백을 한다. "사실 나는 소아성애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 파렴치한 소아성애자? 아니면 한 평생 아동을 위해 살아온 성인? 아니면 균형적으로(?) 소아성애자 본능을 억제한 성인?

 

실제 사례도 아니고, 극단적인 예를 든 내용이지만 쉽사리 답을 내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먼저 이 질문에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성적 능력'이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무조건 밥을 먹지 않고, 자고 싶다고 무조건 자지 않는다. 이성에 따라 법을 준수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발적으로 제약한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억제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의를 내릴 때 '행동'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습관 등 여러가지 요소에 의해 흐려질지는 몰라도 우리의 본질은 쉽사리 변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절대 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질, 본능 등으로 평가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논리적 비약이지만, 만일 그러한 요소를 중점적으로 평가하면 그 사람은 어차피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미 정의가 내려져 있기 떄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본능은 서로 거의 유사하며 사실상 파악하기도 어렵다. 이는 본능이 아닌 신념, 개인 가치 체계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는 별개로 '이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분해해보면, 본질(본능)에 따른 욕구 등이 형성되고 고 이후 이를 '이성'을 통해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결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행동(선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나온 브루스 웨인(배트맨)과 그의 어릴적 소꼽친구 레이첼의 대화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말하고자 하는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물론 레이첼은 이 당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오해가 섞여 있다.).

 

입시를 경험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면접이었다. 논술을 통과하고 보는 면접이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합격했다는 큰 자만(?)에 빠져서 면접을 보았다. 그때 내 기억으로 면접 문제를 요약하자면, "동기가 좋은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와 동기는 불순하지만 결과가 좋은 경우" 두 가지를 비교하는 문제였다. 당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고, 단지 철학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지원했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 여러 사회 이슈들을 보면서 드는 사색이 이 질문과 어느정도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기와 결과에 초점을 맞춘 문제였기 때문에 관점은 다르다. 하지만 "과연 '사람에 대한 정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요소는 어떤 요소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옳은 것일까?

 

우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본질, 생각, 그 사람의 신념, 환경 등 여러가지 요소를 놓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행동'이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한 소아성애자 사람을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아동에 대한 성적 관심은 많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인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확실하게 아동에 대해서 성적 흥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많은 교육을 받으며,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억제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며 자신을 향해 웃는 아이, 자신에게 포옹을 해주는 아이, 뽀뽀를 해주는 아이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며 만족감을 얻어 왔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아동의 복지를 크게 개선시키고 수 많은 아이들이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성인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고백을 한다. "사실 나는 소아성애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 파렴치한 소아성애자? 아니면 한 평생 아동을 위해 살아온 성인? 아니면 균형적으로(?) 소아성애자 본능을 억제한 성인?

 

실제 사례도 아니고, 극단적인 예를 든 내용이지만 쉽사리 답을 내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먼저 이 질문에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성적 능력'이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무조건 밥을 먹지 않고, 자고 싶다고 무조건 자지 않는다. 이성에 따라 법을 준수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발적으로 제약한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억제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의를 내릴 때 '행동'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습관 등 여러가지 요소에 의해 흐려질지는 몰라도 우리의 본질은 쉽사리 변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절대 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질, 본능 등으로 평가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논리적 비약이지만, 만일 그러한 요소를 중점적으로 평가하면 그 사람은 어차피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미 정의가 내려져 있기 떄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본능은 서로 거의 유사하며 사실상 파악하기도 어렵다. 이는 본능이 아닌 신념, 개인 가치 체계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는 별개로 '이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분해해보면, 본질(본능)에 따른 욕구 등이 형성되고 고 이후 이를 '이성'을 통해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 결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행동(선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본질에 따른 욕구와의 충돌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최종 단계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행동 이전 단계인 생각까지는 사실상 본질에 따른 욕구와 평행한 2개의 레일로 진행된다. 그리고 결국 행동(선택)이라는 하나의 레일로 합쳐질 때, 충돌하게 된다.

 

단순히 본질, 욕구, 판단 등을 보면 어떤 행동을 내릴 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행동(선택)이라는 레일이 계속 이어져 도달하는 곳이 바로 그 사람의 삶이고 인생을 나타내는 종착역이라는 점이다.

 

종종 우리의 주변에는 단순히 그 사람의 말로만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정의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평소에 이야기 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본심의 '유약함'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본심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여러 환경적인 요소에 무너지고, 심지어 더 나아가 본심이 처음에 안 그랬다는 듯이 왜곡을 하기도 한다. 나약한 우리의 본심은 쉽사리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저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누구나가 무단횡단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쓰레기를 버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다.

 

주제가 다른 곳으로 샌 것 같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행동'의 중요성이다. 본인의 생각, 본능 등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행동'이다. 생각은 천지차이일지라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생각은 동일할지라도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¹

 

변하고 싶으면 행동을 바꾸면 된다. 단지 생각에만 머문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¹ 그러나 '말', '언행' 또한 행동의 일환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다만, 위에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 경우 세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즉 직접적 행위, 간접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말'만 하는 것이 때로는 직접적인 행동인 경우가 있다. 그 말 자체가 직접적인 행위인 경우를 예를 들면, 학급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반 선생님 또는 또래 친구들에게 말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반대로 단지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위해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간접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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